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데뷔 30년 기념 런던 공연이 열린 1991년 여름.공연 직전 비가 쏟아지자 하이드파크에 모인 관중은 일제히 우산을 펴들었다. 하지만 파바로티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자 하나둘씩 우산을 접었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 탓에 노래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만 관객 대부분이 빗속에서 공연을 지켜봤다. 찰스 왕세자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다이애나도 우비를 입고 두 시간 동안 노래를 감상했다.

2003년 8월 조용필 데뷔 35년 기념 공연이 열린 잠실 주경기장에도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주최 측은 자리가 빌까 걱정이 많았지만 기우였다. 10대부터 70대까지 4만5000여명이 객석을 꽉 채운 것은 물론 끝까지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다. 빗속에서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했다. 2005년 8월 평양 공연 초반엔 북한 관객들 표정이 굳어 있었고,객석엔 냉기가 흘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혼신을 다한 열창에 눈물을 글썽였다. 재창을 외치면서 기립박수까지 보냈다.

조용필은 1992년 정상에 있을 때 더 이상 방송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파로 매개된 만남 대신,팬들과의 직접 대면을 택한 것이다. 이후 크고 작은 무대에서 '생 목소리'로 끊임없이 관객을 만났다. 그의 공연은 간단한 인사말 외에 '멘트'가 없기로 유명하다. 음악과 관객과의 교감을 방해한다는 생각에서다.

그의 음악은 이제 불우한 이웃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영혼의 메아리가 되고 있다. 지난해 5월 잠실 주경기장에선 소아암 환자돕기 공연 '러브 인 러브'를 마련했다. 남몰래 장학재단을 만들어 청소년들을 돕고 있기도 하다. 지난 15일엔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다. 작년 5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소록도 공연을 하면서 "다시 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단발머리'를 시작으로 '허공''한오백년'등을 열창했다. '친구여'를 부르며 객석으로 내려섰을 땐 환호성이 터졌다. 일일이 손을 맞잡고 포옹하는 그에게 한센인들은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며 감격했다. 마지막곡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를 들으며 아쉬워하는 한센인들에게 "내년에 다시 뵙겠다"고 했다. 마음을 열고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곳엔 어디든 찾아가겠다는 약속이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조용필은 여전히 가왕(歌王)이었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