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에 있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아프리카 동물조각과 상아,뿔,목각인형들이 가득하다. 앵무새와 문조도 대여섯 마리 날아다닌다. 갓 볶은 커피 내음이 침향과 어우러져 환상 속의 동굴 같다. 벽에는 그의 사진작품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패널들이 걸려 있다.

아프리카 등 '세상의 끝'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내는 빛의 예술가 김중만 씨(57).특유의 레게 머리를 흔들며 그가 크게 웃었다.

"하하,처음부터 아프리카를 선택한 건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로빈슨 크루소'를 밤새 읽고 '나중에 탐험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죠.1960년대 거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대통령이나 과학자,군인을 장래 희망으로 삼을 때 전 소설가를 꿈꿨어요. 중학교 시절에도 청계천 헌책방에서 살다시피했죠.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아프리카로 가자고 할 땐 만세를 불렀습니다. 드디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는구나,정말 기뻤죠.그때 제가 알고 있던 아프리카는 타잔밖에 없었어요. 밀림이 우거지고 야생동물이 뛰노는 탐험의 세상으로 들어간다며 들떴는데 도착해서 보니까 부르키나파소라는 사하라 사막 끝자락의 작은 나라더군요.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때 꿈을 접었죠.아,세상은 내 생각하고 많이 다르구나…."


가장 열악한 지역의 정부 파견의사를 자청한 아버지는 "여긴 학교도 없다. 꼭 공부하고 싶으면 프랑스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는 혼자 프랑스로 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서부의 숄레에 있는 학교였는데 1500여명의 학생 중 한국인은 그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따당할 것 같지만 아니예요. 다들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몰려들었죠.특히 여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프랑스어를 빨리 배울 수 있었죠.여자 아이들이 모이니까 자연히 남자친구들도 늘어나고.그 덕을 많이 봤습니다. 돈이야 뭐 온갖 아르바이트하면서 다 해결했지요. 하룻밤에 접시 1000개 닦는 건 일도 아니죠.주말과 방학 때 알바하고,대학 다닐 땐 4개월 DJ 해서 1년치 다 벌었습니다. "

어릴 때부터 '겁 없는 소년'이었던 그는 니스에서 대학에 다닐 때 뜻밖의 인연을 만났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누군가 그에게 중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고는 '왜 그러냐'고 되물었더니 '작가 지망생인데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한문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나도 작가 지망생이니 일상적인 한자는 가르쳐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프랑스 소설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였다. 둘은 아주 우연히 만나 친해졌고 공부도 함께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제가 파리로 간 뒤에는 자주 못 만났는데 30년 만에 보니 이화여대에 와서 강의를 하고 있더군요. 너무나 반가워서 연락하고 여기 스튜디오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선생님의 아버지도 30년간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봉사활동했고,제 아버지도 30년 동안 그랬고,30년 만에 다시 우리가 만났으니 기막힌 우연이라며 좋아했죠.헤어질 때 스튜디오를 나가면서 '이대 가려면 버스 어떻게 타냐'고 묻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적인 문학가가 낯선 나라에 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걸 보고 부끄러웠어요. "

더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돌아서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랑 나랑 아프리카에 대한 인연도 있으니까 책을 함께 낼까 그래요. 좋다고 했죠.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됐고 몇 달 뒤 출판사와 계약도 맺었습니다. 주제는 노예에 관한 건데,보통 소설가와 일을 하면 사진가는 일러스트레이션의 개념인데 그런 게 아니고 선생님이 소설을 쓰고 저는 스토리 전개와 상관없이 독립적인 시각을 넣으라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이 곧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죠.천천히 작업할까 물었더니 예정대로 하자고 해서 2009년에 한 달간 세네갈과 코트디부아르,가나 등을 다녀왔습니다. "

그의 사진 작업은 이미 완료됐지만 르 클레지오의 소설은 아직 미완성이다.

"선생님도 막상 상을 타고 나니 글 쓰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워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편한대로 하십시오 하고 2년도 좋고 5년도 좋다고 했죠.선생님이 사진을 꼼꼼히 보더니 '이제 내 일만 남았네'하더군요. 아마 지금 글 쓰고 있을 겁니다. "

그도 르 클레지오처럼 사진에 부담을 느낄 때가 많을까. 사진이 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사진은 죽음"이라고 했다.

"고통스럽죠.보는 사람에게는 공감대와 메시지를 주고 영감도 줄 수 있겠지만 찍는 사람으로서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무작정 나가 광활한 사바나를 다니는데 야생동물을 찍는 게 소재를 연출할 수도 없고 그것도 짧은 시간에 잡아내야 하니까 힘들죠.셔터를 한 번 누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아요. 이게 잘 나올까,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메시지나 미학,기술적인 완성도가 괜찮은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래서 웃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딱 한 번 평원에 집중하는 제 모습이 행복해보였다는 얘길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하하."

그런데도 그의 표정은 늘 밝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 덕분이라고 했다. 4년 전 아무 계획 없이 일을 그만둔 것도 마찬가지.2007년 백수 선언하기 전 그의 수입은 한 해 17억원에 이르기도 했지만 이듬해 8000만원으로 줄었다고 했다. 그래도 행복한 것은 '자신만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고 소재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사진을 전공하는 제자 4명과 그래픽 디자이너 1명 등 5명의 스튜디오 식구들과 '잘 먹고 잘 산다'고 했다. 요일별로 찾아오는 문하생은 헤어 스타일리스트,타투이스트,미국인,웨딩포토회사 사장,CF감독 등 6명이다.

그가 문하생을 뽑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포트폴리오를 보고 숙제를 줘서 여러 번 검토한 다음 결정하는데 기준은 딱 하나다. '이 친구가 죽을 때 카메라를 들고 관 속에 들어갈 만하다' 싶으면 받아들인다.

다행히 그의 작품을 소장하려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 백수생활을 버티고 있지만 그는 파는 것보다 생산하는 것에 집중한다.

"아직까지는 이게 접니다 하고 내놓을 만한 사진집도 거의 못 만들었는데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4년간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오지에 나가서 찍은 작업도 있고,출퇴근 시간에 만나는 중랑천 뚝방길의 나무들을 찍은 것도 3년 정도 됩니다. 뚝방길 사진은 외국 출판사에서 낼 계획입니다. "

그가 쓰는 카메라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캐논으로 작업한다고 했다.

"저는 모든 기종의 카메라를 다 씁니다.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 중 필름이 60%,디지털이 40% 정도라고 할까요. 필름은 없어지는 추세라 아쉬운데 아직까지 필름을 좋아합니다. 카메라를 10대 이상 갖고 다니지만 주로 쓰는 건 Mark-3입니다. 그런데 이런 건 일반인에게 필요없습니다. 무겁기만 해요. 크롭 바디인 캐논 7D 정도면 그걸로 충분할 겁니다. "

달리는 사자를 포착할 때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대부분 실패했고 어렵습니다. 사자가 밤에 사냥하잖아요. 밤에 촬영은 불가능하고 새벽에 겨우겨우 찍는데 그것도 제대로 찍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은 환갑을 기념해 1년 동안 평원에 들어가 있을까 하고 계획 중입니다. "

그는 사진작가나 예술가가 아니라 그냥 사진가로 불리길 원한다. 누구나 쉽게 들어설 수 있는 길이자 세상을 더 넓게 만들어주는 길이 곧 사진 찍는 일이라는 것이다.

"길을 가다 100만원짜리 피아노를 샀다고 해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길 가다 100만원짜리 카메라를 사는 순간 그는 벌써 사진가입니다. 가볍지만 진실하고,부족하지만 발전할 수 있고….그렇게 시작하는 거죠.사진이 고통이지만 그래도 세상의 빛과 어둠을 기록하는 나름의 기쁨이 있어 견딜 만합니다. "

만난 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국제협력단·플랜코리아 홍보대사 맡아…"세상의 끝까지 빛을 심죠"

상금 5000만원 '희망의 골대 짓기' 기부


김중만 씨는 최근 정부 무상원조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홍보대사를 맡았다. 물론 KOICA와 인연을 맺기 전에도 오지에서 활동하는 한국 청년들을 보면 밥을 사주곤 했다.

"젊은이들이 2년이나 4년 동안 제3세계에 나가 영혼과 기술을 나누는 게 참 대단하죠.KOICA가 존경스러워요. 젊은이들에게도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고 기회이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로 돕는 거죠."

그의 선친이 그랬듯이 이들이 인류애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이 더 갈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아프리카부터 시작해서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등에서 활동하는 KOICA 해외봉사단원들과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렌즈에 담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2~3주 일정으로 2~3개 나라씩 돌아볼 생각입니다. "

그는 지난해 '로얄살루트 마크 오브 리스펙트' 수상자로 선정돼 상금 5000만원을 국제아동후원단체인 플랜코리아에 기부했다. 그 기부금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희망의 골대 짓기' 사업에 사용된다.

그는 시상식에서 "좋은 사진을 갈망하는 작가를 위로하고 앞으로도 계속 나눔의 가치를 실천해 가라는 뜻으로 주어진 상 같다"며 "절망 속에 갇힌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축구 골대는 축구를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열정과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기에 더욱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아프리카에 '희망의 골대'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짓는 그의 작업은 그것 자체로도 '빛의 예술'이다. 하긴 한 해 동안 가장 존경받은 문화예술인에게 수여하는 이 상의 수상자가 박찬욱 감독,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황석영 소설가,정명훈 지휘자,배우 안성기 씨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