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프랑스 혁명 열기 잠재운 '골드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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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포니아 드림
19세기 캘리포니아서 금맥 발견
프랑스인 대거 이주…정부도 거들어
와인ㆍ요리 등 美서부 도시에 전파
19세기 캘리포니아서 금맥 발견
프랑스인 대거 이주…정부도 거들어
와인ㆍ요리 등 美서부 도시에 전파
캘리포니아(California)라는 이름은 스페인 탐험가이자 작가인 몬탈보가 1510년에 쓴 소설에서 유래했다. 그리핀 같은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금이 많이 나며 칼라피아(Calafia) 여왕이 다스리는 이상 국가의 이름이 캘리포니아였다. 일설에 의하면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너무나 황량한 풍광을 보고 역설적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 그대로 지명으로 고착됐다고 한다.
이 땅은 멕시코 소유였지만,1846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1848년 2월2일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통해 미국에 넘겨졌다. 조약 체결 며칠 전 캘리포니아 내륙 산지에서 금이 발견됐고,곧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다음해인 1849년에 구름처럼 몰려든 이 사람들을 포티나이너(forty-niner)라고 부른다.
널리 알려진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은 포티나이너의 슬픈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금 러시(gold rush)는 미국 동부에 살고 있던 미국인들뿐 아니라 세계 각지 사람들에게 금을 캐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었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시기에 캘리포니아에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 프랑스인들도 적지 않은 수를 차지했다.
프랑스인들은 해외 이주나 심지어 해외여행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유포된 것은 19세기 말 프랑스 민족주의가 강화돼 '아름다운 프랑스'를 떠날 이유가 없다는 식의 신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기에는 상당수의 프랑스인들이 미국 각지로 들어갔다. 그 중 유명한 인물로는 장루이 비뉴가 있다. 그는 1826년에 동료들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 가서 양조장을 지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1829년에 감리교의 영향으로 하와이에서 알코올 제조가 금지되자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곧 고급 포도주 생산에 성공해 '캘리포니아 포도 재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프랑스인들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몰려온 것은 1848~1849년 이후의 일이다. 1848년 북아메리카에서는 미국 영토가 폭발적으로 팽창했지만,구대륙 유럽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넘치던 해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분출된 시민의 자유와 민족의 권리를 다시 억압하려는 보수 체제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혁명과 민족주의 혁명,산업화의 진전으로 생겨난 노동계급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등 여러 움직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해 말 이런 혁명 운동들은 거의 대부분 억압됐다. 많은 활동가들이 당분간 혁명의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바로 이 순간에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미국은 여러 의미에서 기회와 꿈의 땅으로 인식됐다. 1849년에 약 4만명의 프랑스인이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이 가운데 절반인 2만명 정도는 1848년 혁명에 참여했거나 그 이상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해 초 봄부터 프랑스 전역에 캘리포니아 금 열기가 넘쳤다. 신문에는 "수백 마일의 땅에 금이 섞여 있어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수 세기 동안 일해야 금을 다 채굴할 수 있다"거나 "1m만 땅을 파면 금이 나온다"는 식의 과장된 기사들이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극장에서는 '새크라멘토의 금 채굴업자' 같은 연극이 공연됐다. 캘리포니아의 금광 지도가 나돌았고,분명 사기성 짙은 회사들이 이미 금광 지역 땅을 사두었다며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캘리포니아 이민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도주의 단체들도 생겨났다. 이런 일들을 지켜보던 마르크스는 "파리의 프롤레타리아에게 금광의 꿈이 사회주의의 이상을 대체했다"고 탄식했다.
프랑스 정부까지 한몫 거들었다. 복권을 발행해 1등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고,5000명에게 캘리포니아 항해 운임을 대주었다. 분명 지난 혁명 때 폭동에 가담했던 불온한 젊은이들을 해외로 보내버리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캘리포니아 이주민들이 모두 '실업자와 창녀'였다는 말은 틀린 주장이었고 번듯한 상인,기술자,지식인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외지에서 큰돈을 번 다음 다시 귀국하려는 생각을 했고 실제 그렇게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몇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천국과 거리가 멀었다. 아직 항구시설이 건설되지 않아 뭍에 오르려면 짐을 등에 지고 뻘밭을 걸어가야 했다. 이 때 이미 짐작했을 터다. 그들은 허름한 창고 안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고,식량이 부족해 계란 하나가 1달러에 팔렸다.
금광을 발견해 거부가 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는 제법 도시다운 모양을 갖추어갔다. 1852년 이 도시 인구 5분의 1 이상이 프랑스인이었다. 이들은 영어를 하지 못하므로 다른 미국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프랑스 구역에서 자기네들끼리 살았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내륙의 여러 지역에 퍼져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그곳에서도 이들은 주말에 모여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힘차게 부른 다음 정치 문제를 토론했다.
1848년 구대륙의 뜨거운 혁명 열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신대륙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꿈으로 이어졌다. 캘리포니아는 혁명적 이상주의와 일확천금의 기회주의가 교묘하게 뒤섞인 상태에서 형성된 도시였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