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2009년부터 쌀 시장 조기 개방(관세화)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쌀 관세화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막상 실행 단계에선 이런저런 이유로 관세화 시점을 미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당초 2015년으로 예정된 쌀 시장 개방 시점을 내년으로 앞당기려고 했지만 사실상 백지화했다.

◆쌀 시장 조기 개방 포기,왜?

정부가 쌀 시장 조기 개방에 소극적인 것은 무엇보다 '정치적 이유'가 가장 크다는 게 관가 안팎의 분석이다. 농민들의 반발이 심하고 주식인 쌀 시장 개방에 대한 국민적 정서가 호의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쌀 시장 개방을 추진하려면 농식품부뿐 아니라 범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수적이지만 현 정부 임기 말인 데다 대선을 1년6개월가량 앞둔 시점에서 이런 리더십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취임한 서규용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전임 유정복 장관이 농민단체 반발을 무릅쓰고 일관되게 밀어붙였던 쌀 관세화와 농업 보조금 개혁 등을 잇따라 번복하고 있다.

쌀 관세화는 물리적으로도 힘든 시점까지 왔다. 정부가 내년부터 쌀 시장을 개방하려면 올해 9월까지 세계무역기구(WTO)에 시장 개방에 대한 의사 표시를 해야 한다. 그 전에 농민단체에 대한 설득 작업이 선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정부 관계자는 "쌀 시장 개방 문제는 2008년 현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은 쇠고기 촛불집회와 같은 파급력을 갖고 있는 사안"이라며 "대선을 앞둔 시점에 이런 민감한 문제를 꺼내기는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쌀 시장 조기 개방의 실익이 적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2015년에 쌀 시장이 개방될 텐데 굳이 3년 정도 앞당기려고 지금부터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도하라운드(DDA) 협상에 탄력이 붙고 있는 점도 변수로 꼽힌다. 쌀 시장 개방이 유예된 것은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를 인정받은 것과 무관치 않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한국이 쌀 시장을 조기 개방하면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라'는 압력이 커질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다른 공산품 관세 협상에도 유리할 게 없다"고 말했다.

◆쌀 의무수입 연간 2만t 증가

쌀 시장을 언제 개방하느냐는 한국의 쌀 의무수입물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당초 농식품부 계획대로 쌀 시장 개방이 내년부터 이뤄진다면 한국의 쌀 의무수입량은 연간 34만8000t으로 고정된다. 반면 쌀 시장 개방 시점이 2015년부터로 미뤄지면 의무수입량은 40만9000t으로 지금보다 6만1000t 늘어난다. 이에 따른 추가 수입 비용은 연간 4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여기에 쌀 보관비용까지 감안하면 비용은 더 불어날 수밖에 없다.

쌀 의무수입량 증가는 가뜩이나 남아도는 국내 쌀 재고량을 더욱 늘린다는 문제도 있다. 당초 정부가 쌀 시장 조기 개방을 서두른 이유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어차피 2015년부터 관세화해야 하는 마당에 1년이라도 빨리 관세화하는 것이 쌀 의무수입량을 줄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 쌀 관세화

국내와 국제 쌀 가격 차이에 근접하는 수준의 관세를 부과해 시장을 개방하는 방식.한국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2004년까지 쌀 관세화 유예(시장 개방 유예) 조치를 인정받았고,2004년 재협상에서 관세화 유예를 2014년까지 연장했다. 대신 의무수입 물량인 최소시장접근(MMA) 물량을 매년 2만여t씩 늘려 수입하고 있다.

주용석/서보미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