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구강진 씨(55)는 요즘 밤잠을 설칠 정도로 고민이 많다. 연말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어서다. 두 자녀가 모두 대학을 졸업했지만 문제는 노후 생활비다. 자녀 학자금을 대느라 수년 전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았고 저축도 거의 못한 탓에 집 한 채가 전부다. 구씨는 "막상 퇴직하려니 손에 쥔 게 없다"며 막막해했다.

'준비 없는 노후는 재앙'이란 말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게 원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평균 수명은 1989년 70.8세에서 2009년 80.5세로 늘어났다. 인구 10만명당 3.8명은 100세 이상 초고령자다. 전문가들은 "은퇴 이후 20~30년간 할 일을 만들어야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은퇴 후 일거리 있으면 자신감"

꼼꼼히 준비한다면 퇴직 이후 제2의 직업을 갖는 게 어렵지만은 않다는 게 은퇴자들의 설명이다. 시중은행에서 '청춘'을 보낸 후 작년 퇴직한 C씨(56)는 "은퇴 전까지는 이런 행복을 몰랐다"고 말한다. 대학 강의를 나가면서 소득이 종전의 30% 수준으로 줄었지만 평소 원하던 일을 하는데다 시간도 훨씬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다. 그는 모 대학에서 실전 경험을 살린 경영학 강의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C씨는 "은행에 다니면서 7,8년간 틈틈이 공부해 학위를 따놨던 게 큰 도움이 됐다"며 "걸을 힘만 있으면 강단에 계속 서고 싶다"고 전했다.

부산 해운대구에 거주하는 김숙자 씨(57 · 여)는 5년 전부터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다. 50대 초까지 보험설계사 일을 했는데 젊은 인력들이 유입되면서 경쟁하는 데 힘이 부친다고 느껴서다. 김씨는 다섯 번 시도한 끝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그는 "주변을 보면 대기업에 다니다 퇴직하고 아파트 경비를 보는 분이 적지 않다"며 "적게 벌더라도 내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봉사로 제2의 인생 사는 사람들

봉사활동 역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육군 중령 출신으로 2003년 청와대 경호실(3급)에서 정년 퇴직한 강성규 씨(62)는 퇴임 전 다양한 자격증을 준비했다.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가정상담사 등 그가 딴 복지 관련 자격증만 여러 개다. 그는 현재 서울청소년효행봉사단을 이끌면서 나눔의 뜰 대표,원천사회복지센터 회장 등을 맡고 있다. 강씨는 "퇴직 후에도 평소와 똑같이 매일 오전 4시20분에 일어나 밤 10시 이전에 취침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며 "일은 다르지만 꽉 짜여진 일과를 소화한다는 점은 젊을 때와 똑같다"고 말했다.

봉사활동에 전념하려면 일정한 수입도 중요한 문제.비상근으로 일하는 정보통신업체에서 나오는 월급과 공무원 연금으로 일부를 충당한다고 했다. 강씨는 "75세까지 봉사를 계속하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서울 강남의 모 여고에서 교장으로 근무하다 5년 전 은퇴한 이창배 씨(70)도 봉사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이씨는 노년층이 중심인 강남사랑시니어봉사단을 이끌면서 '남은 반찬 줄이기'와 같은 길거리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이씨는 "봉사와 신앙활동을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고 했다.

◆일 · 봉사 · 취미활동 중 한 개는 있어야

전문가들은 퇴직 후 △일정 직업이나 △자원봉사 △규칙적인 취미생활 중 적어도 한 가지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야 '은퇴 증후군'인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언이다. 특히 직업을 갖게 되면 부족한 노후자금을 충당할 수 있고 지속적인 사회 접촉을 통해 고립을 피할 수 있다.

이석원 서울대 교수(행정학)는 "노인들이 일을 갖게 되면 소득과 관계없이 건강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며 "규칙적인 생활과 정서적인 안정감이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노년층 일자리는 생산가능 인구를 확대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고령화 대책이란 게 그의 얘기다. 이선혜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도 "은퇴 이후 일자리나 봉사 등으로 일과를 구조화시키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유태균 숭실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퇴직을 앞둔 직장인이라면 치밀한 은퇴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며 "봉사활동을 원하면 지방자치단체 등을 통해 미리 계획을 짜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