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실.가로 10m짜리 대작 '꽃 2011-1'과 '꽃 2011-2'가 양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두 작품을 합치면 꽃잎이 연결되는 연작이다. 강렬한 색감에 넘치는 에너지.작가의 말처럼 '색은 색을 부르고 꽃은 또 다른 꽃을 부른다'. 거대한 꽃잎이 물이랑 사이로 흔들리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그 사이로 작은 벌레들도 보인다.

"꽃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부족할 것 같아서 벌레를 붙였어요. 사실 꽃은 벌레를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벌레 없는 꽃이 어디 있어요. 저쪽 그림에는 벌레가 더 많습니다. 벌레라는 것이 생명의 출발이기도 하지요. 벌레가 꽃을 해친다고 생각하지만 성충이 되면 더 이상 해치지 않고 몸을 바꿔요. 곤충에게 '변태'는 굉장히 중요하지요. 인간은 계속해서 밥이니 뭐니 더 많이 축적하면서 해치지만 곤충은 안 그렇습니다. 첫 그림의 시작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 놓은 것도 그 때문이죠."

회화부터 설치,공공미술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토털아티스트 임옥상 씨(61).그가 26일부터 가나아트센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고 있다. 2003년 갤러리 편도나무에서 연 '가을 이야기' 이후 8년 만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물,불,철,살,흙'.9월18일까지 24일 동안 50여점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역사적 기억'을 펼쳐 보인다.

'물,불,철,살,흙'은 인류 생존의 근본 요소인 동시에 감성과 영혼,기술까지 아우르는 원소.그 중에서도 흙은 자기 성찰과 존재 이유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매체다. 그는 이 같은 5원소가 다양한 기억에서 출발해 시간 흐름에 따라 확장돼 왔을 뿐 사실은 하나의 줄기에서 파생됐다는 것을 일깨운다.

"흙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그 모든 것은 흙으로부터 나오고,그러니 시작과 끝도 서로 맞물려 있지요. 오랫동안 흙과 씨름해왔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색 좀 실컷 쓰자고 생각했죠.캔버스 천을 쫙 펼치고 마구 그렸는 데 흙과 회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게 그렇게 신날 수 없었어요. 흙에서 꽃도 피어나잖아요. 흙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상태.그게 생명이죠."

가로 세로 2m 규모의 '꽃-귀'도 강렬한 작품이다. "눈,귀,코 작업하다가 생각한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자.그래서 꽃에다 눈,코,입을 집어넣었죠.두 귀를 합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꽃-입'이라는 그림에는 꽃잎 한가운데에 붉은 입술이 있고 그 입술 속에 작은 입술들이 여럿 들어있다. '꽃의 입엔 이가 없고 꿀과 향기만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2층에 전시된 흙 시리즈는 생명의 의미를 더 확장하고 심화한 것이다.

"이게 '흙큐브 연작'인데 흙에 숯가루를 섞고 표면에 그걸 던지듯 뿌린 거죠.흙을 만지고 표현하다보니까 내 몸을 흙에 던지고 싶고 흙을 씹어먹고 싶기도 하고 그런 경지에 들어가더라고요. 씹어먹는다고 그림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그런 단계를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던지는 방법을 생각해낸 거죠.이게 큐브니까 나의 방이기도 합니다. 나만의 온전한 세상.완전히 격리된 세상이 아니라 하늘도 보이고,제 작품노트처럼 낙서도 있고.이 흙벽이 굉장히 글씨를 잘 받아들여요. 긁어내거나 색깔을 칠해도 되고,모든 걸 담아내는 그릇이죠."

맨흙을 미술품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대개는 흙을 굽거나 떠서 쇠로 채우고 변형하지만 그는 맨흙 작품을 전시공간에 그대로 옮긴다. 아무리 예술적이라고 해도 저렇게 숯가루흙을 마구 뿌린 걸 누가 살까 걱정이 됐다.

"할 수 없죠.그 시대에 수용되지 않으면 밖에 놔두는 거죠 뭐.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게 돼 있잖아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끝까지 소멸되지 않겠다는,죽지 않겠다고 나대는 인간들처럼 쇳덩어리,돌덩어리 갖고 '언젠가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며 고집 부리는 것도 폭력입니다. 쓰러질 준비가 돼 있어야죠.시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기꺼이 사라질 준비를 하는 그런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그 옆에 있는 '흙 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새겨져 있다. 첫 번째 작품 속의 인물들은 뉴스메이커,두 번째 작품 속에는 가족과 친구들,세 번째에는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인간 중심의 세상에 대한 제 나름의 화두를 던지고 싶었죠.인간 중심이 초래하는 문제가 많잖아요. 기후변화 시대에 온난화니 뭐니하는 문제부터 자기 중심 사고와 거대 조직과의 갈등도 그렇고.인간 이외의 것으로 시선을 확대하고 연민과 사랑을 더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비교적 얌전한 작품도 있다. '흙웅덩이'다. 한지에 흙을 문질러 만든 것.길다란 한지 위에 질경이가 무성하게 깔려 있고 가운데에 달처럼 둥근 여백이 있다. "질경이가 무성한 자투리 땅을 복사했죠.이 흙 색깔은 부식토를 채취해서 체를 쳐 얻은 겁니다. 한지에 흙을 붙여서 완성했죠.가운데 둥근 공간은 웅덩이라고 할 수도 있고,구멍이라고 할 수도 있고,탈출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팔릴 것 같아요. 하하."


광화문 일대를 분홍색 물로 가득 채운 작품은 전시회의 표제작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의 턱 밑까지 물에 잠겨 있다. "담론을 하나 만들고 싶었죠.광화문에는 항상 얘기가 넘치잖아요. 넘친다는 것,이게 저의 화두였어요. 넘친다. 그건 물.어떤 물? 그래,애매한 분홍색.아무것도 얘기하진 않지만 아주 매력적인,자극적이고 섹시한 것으로 채우고 사람들이 사유의 유영을 즐기도록 한 거죠.저 옆에 있는 작품은 일본이 바닷물에 잠긴 겁니다. 후지산만 남았죠."

규모나 주제 면에서 방대하고 대담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치열한 노동에서 나온다. 환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열적인 그의 힘도 '흙'을 닮은 몸에서 나온다. 언제 작업하고 언제 쉬나.

"저는 주로 일과시간에 작업합니다. 장거리 게임인데 밤늦게까지 하다보면 지치잖아요. 일상은 일상답게 해야지,그림에 져서는 안 되지요.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시작합니다. 보디빌딩도 하고 수영도 하고.저녁 때 일 끝나면 한 잔하고."

충남 부여에서 어린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꾼 그가 서울대 미대와 프랑스 앙굴렘미술학교를 거치고,민중미술과 공공미술을 지나 흙과 생명의 뿌리를 껴안기까지 61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는 지나온 시간보다 다가올 시간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게 '예술의 역사적 기억'을 넘어 '예술의 역사적 꿈'을 완성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