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아무도 하이에크를 좋아하지 않는다
늦은 저녁 열어둔 창으로 밀려드는 가을 바람을 느끼며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꺼내든다. 원저는 1944년 3월10일에 출간되었다. 나치 공습이 런던을 초토화시키면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바로 그 시기에, 바로 그 도시에서 쓰여졌다. 근육을 자랑하던 국민국가들이 벌이는 집단 살육전이었다. 사회주의적 열정이 어떻게 사회를 파괴하는지를 하이에크는 우울한 심경으로 써내려갔다. 인간의 나약성과 바로 그 나약성이 만들어 내는 정치적 광기 말이다. 조지 오웰도 3년 후에 《1984》라는 제목의 비슷한 글을 썼다.

하이에크는 '모든 정당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노예의 길》을 헌정했다. 20세기 마지막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에릭 홉스봄은 약간 비꼬는 어투로 하이에크를 '광야의 외침'이라고 불렀다. 시류와는 동떨어진 진리라는 이중언어적 수사였다. 하이에크의 친구이기도 했던 케인스는 이 책을 "위대한 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 아닌 정부의 개입을 더 바란다. 우리는 더 적은 계획이 아닌 더 많은 계획을 필요로 한다"고 논평했다. 실제로 케인스는 바로 이 '더 많은 계획' 때문에 언제나 바빴다. 그의 '일반이론'은 정치의 새로운 교리로 받아들여졌고 케인스는 IMF창설 등 전후 경제질서를 만들기 위해 대서양을 분주히 날아다녔다.

그렇게 경제학은 대중정치를 합리화하고 추인하는 정책기획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을 쓰면서 대중 민주주의의 필연적 타락을 비판하던 바로 그 시기에 옥스퍼드 칼리지 학장이었던 윌리엄 비버리지 경은 사회보장과 연대서비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적 강령을 구체화한 소위 비버리지 보고서를 발표했다. 당연히 영국은 이후 한 번도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독일 엘베강의 동쪽으로부터 구소련을 거쳐 동북아에 이르기까지를 공산주의가 지배했다. 서구 선진국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식인들의 소련 방문기가 큰 유행을 탔다. 식민지 해방국이었던 한국도 그랬다. 나중에 매카시 의원의 공격을 받았던 미국 지식계도 다르지 않았다. 매카시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그의 명단에 올랐던 좌파 지식인들은 소련이 망한 후에야 대부분 진짜 간첩 활동을 했음이 밝혀졌다. 아마 이런 일은 통일 후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런 시대였다.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 질서,그리고 절제된 민주주의와 자기책임,그리고 법치주의에 대한 하이에크의 외침이 대중의 인기를 끌 리 만무했다. 그래서 진정 광야의 외침이었다. 대중 민주주의는 하이에크가 예언한 대로 결국 국민을 타락시켰고 정부 개입은 점점 더 큰 개입을 불렀다. 케인스가 더 많은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정부 개입의 자기강화적 특성을 시인했던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다리를 건설하라는 요구도 좋다,다리를 부수라는 요구도 역시 좋다"고 하지 않으면 정치인은 결코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사기꾼의 피를 갖지 않으면 정치인 노릇하기 어렵다. 정부 규제와 복지 퍼주기는 대중 정치의 필연적 귀결이다. 바로 노예로 가는 길이다.

국민 경제는 이미 자유주의 모국인 미국조차 과도한 국가부채로 숨을 헐떡일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지금처럼 정부와 시장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시장의 실패를 말하지만 그러나 언제건 정부 실패의 반복이었다. 정부들은 작은 실패를 더 큰 실패로 막아왔다. '무조건 돈을 찍어내고 보자'는 이론도 아닌 이론을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리는 혼돈의 시대다.

모두가 신경질적이다. 정부도 정당도 기능을 잃었다. 필연적으로 가짜 구세주들도 나타난다. 이들은 혜성처럼 나타나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실망한 청년 대중들의 열정에 편승한다. 정치는 그렇게 달콤한 연애처럼 시작해서 곽노현처럼 쓰디쓴 배신으로 끝난다. 파란 가을 하늘이 돌아왔다. 한국 정치는 그 하늘을 올려다 볼 일각의 여유도 없다. 밤 하늘은 딥 블루다.

정규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