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밤 11시45분.서울 삼성동 자택(주상복합아파트)으로 올라가기 위해 보안유리문 앞에 선 이은욱 전 피죤 사장(55)은 1층 상가로 이어지는 오른쪽 통로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오른쪽 관자놀이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지며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괴한 2명은 주춤하는 이 전 사장의 왼쪽 팔을 비틀어 바닥에 넘어뜨린 뒤 가슴과 얼굴에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순찰 도중 외마디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경비원의 신고로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당시 아파트 출입문 경비원은 오후 6시 퇴근한 상황이었다. 폭행 장소는 폐쇄회로(CC)TV의 사각지대였다.

서울 강남경찰서에 접수된 '이 전 피죤 사장의 폭행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이다. 강남경찰서는 9일 "지금으로선 용의자를 검거하는 게 최우선이며,그에 따라 향후 수사 방향이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이 전 사장의 아파트 주변 CCTV 7개의 녹화물을 확보,분석작업에 착수했다.

2월8일,이윤재 피죤 회장은 유한킴벌리 부사장이었던 이 사장을 피죤 대표이사로 스카우트했다 4개월 만에 해고했다. 이후 이 전 사장은 부당해고 무효소송을 냈고,두 달 만에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소송과 이번 사건은 직접 관련이 있을까. 앞서 피죤과 이 전 사장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누구 소행인가:"계획 범행" vs "억측일 뿐"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지난 6일 이 전 사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입원 상태라 퇴원하는 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8일 서울 강남 모처에서 만난 이 전 사장은 코와 오른쪽 볼,이마에 부기를 빼는 특수밴드를 붙이고 나타났다. "오늘 3일 만에 머리를 감았다.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번 폭행사건이 피죤 측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피습을 당한 1시간여 뒤 저와 함께 피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김모 전 상무가 협박전화를 받았다고 알려주며 '괜찮냐'고 안부를 물었어요. '이은욱 당한 거 알고 있느냐.빨리 합의해라.당신에게 가족도 있지 않느냐'고 협박해 전화를 끊었다고 하더군요. "

그는 폭행사건 이전에도 피죤 측의 압박은 만만찮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작심한 듯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8월2일로 기억합니다. 100여명의 피죤 직원이 피켓을 들고 집 앞에서 시위를 하더군요. 아내는 놀라 하루종일 집 밖으로 못 나갔어요. 다음날인 3일엔 피죤 직원의 1인 시위가 이어졌고,1주일 뒤인 11일 오후 11시엔 피죤 임원 4~5명이 집 앞에서 '면담'을 요구하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수시로 보내며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대기'하다 돌아갔어요". 이 전 사장의 말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주연 피죤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회사의 공식창구로 이재광 영업담당 상무를 소개했다. 그는 이 전 사장과 함께 유한킴벌리에서 피죤으로 옮겼다. 이 상무는 "정당한 해고였으며 직원들의 시위는 회사 차원의 지시는 없었으며 자발적으로 이뤄진 걸로 안다"며 "이번 폭행사건이 피죤과 연류됐다는 건 억측"이라고 해명했다.

◆해고 배경:'정당한 해고' vs '이해할 수 없다'

기업의 대주주가 대표이사로 스카우트한 '검증된' 인사를 4개월 만에 해고했다. 대표이사는 이에 반발,해고 무효소송을 진행했고 소송 당사자의 집 앞 시위에 이어 '심야 테러'가 발생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게 압축된다. 해석에 따라 '자작극'과 '기업 개입설'이 난무하기가 딱 맞는 우연의 연속이다.

사건 자체는 경찰의 수사 결과가 나오면 가닥이 잡히겠지만 일단 이 전 사장의 해고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피죤은 6월7일 주주총회를 열어 이 전 사장을 해고했다. 이에 이 전 사장은 한 달 뒤인 7월 서울 중앙지법에 해고무효와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피죤 측은 이 전 사장의 해고는 채용계약 위반에 따른 '정당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상무는 "이 전 사장과 피죤 간 채용계약서엔 (이 전 사장이) '공동대표이사'로 분명히 명기돼 있다. 그런데 회사등기에 (이 전 사장이 의도적으로) '각자대표이사'로 올렸고 이는 명백한 계약 위반으로 해임 사유가 된다"고 말했다. 공동대표이사는 비용처리 등 회사경영과 관련된 결재 시 다른 공동대표의 결재도 받아야 하는데,이 전 사장은 이를 어기고 회사의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단독으로 처리했다는 주장이다.

이 상무는 또 "지난 4월 말에야 이 전 사장이 각자대표로 등기된 걸 알게 돼 그동안 결재한 내용을 추적해 보니 1000만원 이상의 결재를 모두 단독으로 처리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전했다. 계약상 공동대표인 이 전 사장이 4월 회사워크숍 비용 등 1000만원 이상 비용결재를 공동대표인 이 회장의 결재를 거치지 않고 단독 처리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이 상무의 이 같은 해고 배경 설명에 이 전 사장은 "억지"라고 일축했다. 그는 "새로 부임한 사장의 회사등기 기재사항은 회사(경영지원실)가 알아서 하고 회장에게 보고하는 게 상식"이라며 "취임 후 4개월 동안 아무말 없다 이를 트집 잡아 사전통보조차 없이 해고한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이어 "(회사등기를 떼보니) 이전 외부에서 대표이사로 모셔왔던 분들도 다 각자대표로 등기돼 있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확인시켜주려는 듯 피존의 등기부를 펼쳐보였다. 2007년 이후 외부에서 채용한 대표이사는 모두 3명.전부 각자대표이사였다. 이들도 길게는 4개월,짧게는 두 달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이 전 사장은 "중국법인 직원 23명의 급여 가운데 70%를 국내법인이 지급하는 게 잘못됐다고 지적하자 다음날로 회사의 자금흐름을 보지 못하도록 조치하더라"며 "그때 잘못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 피죤은 어떤 회사, 30년간 섬유유연제 선두…올들어 매출 급감

피죤은 무역회사 등에서 일하던 직장인 출신 이윤재 회장(77)이 1978년 설립한 회사다. 같은 해 '피죤'을 내놓으며 국내에 섬유유연제 시장을 열었다. 피죤은 LG생활건강 옥시 P&G 등의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30여년간 '지존' 자리를 지켰다. 2005년에는 '액츠'를 내놓으며 액체세제 시장도 접수했다. 여세를 몰아 지난해 중국 톈진에 대형 공장도 열었다. 작년 매출은 1437억원.하지만 올해 매출은 상당폭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섬유유연제의 주 원료인 팜유 가격이 급등한 탓에 '1+1' 기획상품 판매를 상당 기간 중단했기 때문이다.


김동민/하헌형 기자 gmkd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