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스펙' 살짝 부족했던 지원자, 포부 묻는 질문에 "LG트윈스 만세" 했더니…
대기업 S사에 근무하는 강 대리는 요새 하루하루가 즐겁다. 상사의 잔소리와 쏟아지는 업무로 스트레스 받는 건 언제나 똑같지만 강 대리에겐 '야구'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골수 롯데 팬인 그는 '여자친구는 없어도 롯데가 없으면 못 살 정도'다. 최근 롯데가 시즌 초 부진을 딛고 2위로 올라서면서 그의 기분은 째질 것만 같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롯데 관련 인터넷 뉴스를 훑어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반면 같은 팀에 근무하는 문 대리는 풀이 죽은 모습이다. 이 역시 야구 때문.LG 광팬인 그는 여름까지만 해도 스포츠 뉴스를 끼고 살았지만,요새는 관련 사이트에 접속조차 하지 않는다. '9년 연속 가을여행 떠나는 LG','4강 꿈 접은 LG' 등의 꼴보기 싫은 제목들만 올라와서다.

프로야구 관중 600만 돌파를 맞아 야구로 울고 웃는 김과장 이대리의 모습들을 살펴본다.

◆'야신' 경질되자 회사 업무 마비

SK가 '야신' 김성근 감독의 경질을 발표한 지난 8월18일,인천의 한 유통기업 총무팀 업무는 사실상 마비됐다. 정모 과장이 얼빠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자,두산 팬인 팀장이 정 과장에게 한소리했다. "세상 무너지냐.일 좀 해라." 그러자 정 과장은 "오늘은 충격이 너무 커서 일 못하겠다"며 결국 조퇴를 하고 말았다. 정 과장의 부사수격인 김모 대리의 한마디."그런 냉랭한 분위기가 1주일은 가대요. 고(故) 송지선 아나운서 투신 사건으로 두산의 임태훈 선수가 구설수에 휘말렸을 땐 팀장 눈치를 보며 지냈었는데,이번엔 김성근 감독 때문에 사수 눈치까지 보게 됐죠."

야구는 직장생활의 윤활유 역할도 한다. 대기업 전자계열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은 회의 때마다 팀장의 잔소리를 덜 듣는 비결이 있다. 팀장이 주간업무 회의에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그 순간 김 과장은 야구 얘기를 '떡밥'으로 던진다. 그러면 잔소리는 쏙 들어가고 그때부터 화기애애한 야구 대화가 이어진다. 팀장은 골수 LG팬.김 과장은 풍부한 야구 지식으로 적당히 팀장의 얘기 중간중간에 추임새를 넣는다.

◆야구 좋아하는 여직원은 '여왕벌'

야구는 더이상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회사에서 야구를 잘 아는 여직원은 인기가 좋다. D건설회사에 다니는 윤모 대리는 야구를 좋아해서 사내 야구동호회에서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동호회 남성 직원들의 인기를 한몸에 독차지하고 있다. 그의 동료 여직원은 "윤 대리는 동호회 내에서 거의 '여왕벌' 수준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며 "연애를 잘하려거나 어장관리를 하려면 야구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유통기업에 입사한 김모씨도 비슷한 경우다. 김씨의 남자친구는 1주일에 한 번은 야구장에 가서 롯데 경기를 직접 봐야 하는 야구광.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김씨였지만 남자친구를 따라 하도 자주 야구장을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롯데 선수들에 대한 지식을 꿰차게 됐다. 공교롭게도 김씨가 입사한 기업은 롯데 계열 회사.롯데가 전국구 인기팀인 데다 같은 계열사팀이다보니 회사에 골수 롯데팬들이 득실거린다. 김씨가 선배들한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처음엔 남자친구를 따라 야구장에 가는 게 지겨웠지만 이제는 오히려 남자친구에게 야구장을 가자고 조른다"고 말했다.

◆야구 덕에 입사에도 성공

LG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한 모씨는 입사면접 때 특별한 기억이 있다. 학교나 학점은 우수했는데 부족한 영어 실력이 마음에 걸린 것.같이 면접에 들어간 인원 중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은 이는 본인뿐이었고,다소 어눌한 말투까지 더해져 입술이 바짝 마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에 하고 싶은 얘기 있나요?" 면접관의 말에 한 명씩 차례로 포부를 얘기했다. 면접자들 모두 "한국 최고의 마케터가 돼 회사를 빛내겠습니다" "세계 일류기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는 식의 포부를 밝혔다. 드디어 한 과장의 차례가 왔다. 그는 "LG트윈스 만세!"라고 외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곧바로 면접관들의 웃음이 터졌다. 한 과장은 지금도 본인의 입사는 그 한마디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두산 계열사에 입사한 김모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면접 인원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김모씨는 면접을 마치기 직전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면접관의 말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팀인 두산은 뚝심과 끈기로 유명합니다. 저 역시 두산 야구팀처럼 뚝심과 끈기로 회사생활에 임하겠습니다. " 면접관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 올랐고,김씨는 최종합격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강경민/윤성민/고경봉/강유현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