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미의 관심을 모은 외환보유액이 어제 발표됐다. 지난달 말 3033억달러로 한 달 새 88억달러나 줄었다. 원화로 환산하면 10조원이 넘는다.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는 3000억달러선은 유지했지만 보유액 감소폭이 34개월 만에 가장 컸다는 사실이 새로운 불안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장에선 외환당국이 3000억달러를 깨면서까지 달러 매도 개입에 나서긴 어렵다고 보는 탓이다. 당국이 쥔 패(시장개입 여력)가 빤하니 투기세력이 활개칠 여지도 그만큼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외국인은 지난달에도 국내 증시에서 1조3140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8월 5조9245억원에 이어 불과 두 달 동안 7조2385억원(약 60억달러)을 빼갔으니 이보다 더 편리한 현금인출기도 없다. 결국 외환보유액을 헐어 환율방어에 나선 것이 투기세력이 떠나는데 달러로 뒷돈을 대주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고도 원 · 달러 환율은 여전히 1200원선을 넘보고,코스피지수는 1700선마저 힘없이 무너졌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진짜 약을 먹고도 환자가 못 믿어 차도가 없는 '노시보 효과'를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환율 1200원에 방어선을 쳐놓고 보유액을 동원한 게 진짜 약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당국자들의 펀더멘털 언급이 잦아지고 개입이 빈번할수록 투기세력은 더 마음놓고 환율 상승에 베팅해온 게 사실이다. 2008년 7~8월에도 보유액을 150억달러나 소진했지만 환율은 결국 1500원선을 넘겼다.

아무리 펀더멘털 운운해봐야 해외에서 한국은 부도가 날 뻔한 나라라는 낙인이 깊게 찍혀 있다. 외환보유액은 투기세력에 맞서 싸울 최후의 보검(寶劍)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보검은 칼집 속에 있을 때 그 존재감이 발휘되지,아무 때나 빼서 휘두를 무기가 아니다. 보유액을 헐어쓰기 앞서 통화스와프 등 다른 수단부터 강구하는 게 순서다. 글로벌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박재완 장관은 각오를 다지기 위해 머리를 짧게 깎았다지만 나중엔 삭발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