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각하면 "그만 다닐래?"…그가 늦으면 "어디 아픈거야?"
중소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정모 대리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애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정 대리의 '부사수'로 최근 입사한 여직원 김모씨.대형 거래처 사장의 외동딸이기도 하다. 거래처와의 관계도 있는 데다 곱게 자란 '귀한 집 딸'이라 팀장까지 나서 "너무 험하게 가르치지 말라"고 한 탓에 이래저래 신경이 쓰인다.

지난주 있었던 사건이 단적인 예다. 정 대리는 김씨에게 거래처에 전화를 걸어 알아볼 내용을 지시하고는,전화해서 할 말까지 '대본'을 작성해줬다. 정 대리가 이렇게 자상하게 코치했건만,김씨는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하는 게 무서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순간 '열 받은' 정 대리."직접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전화하는 것까지 무서우면 어떻게 일해!" 그러자 김씨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책상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 옆에서 팀장은 도끼눈으로 정 대리를 째려 보고 있었다. "그 일 뒤로는 웬만하면 일 안 시키고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 친구는 춘향이고,저는 향단이 팔자인 모양입니다. "

후배 직원이 들어오면 좋다지만 후배도 후배 나름이다. 고위 공직자 자제,거래처 사장 아들,그룹계열사 임원 딸 등 빽 좋고 줄 든든한 부하 직원은 부모의 '아바타',또 하나의 상전일 뿐이다. 그들 앞에서 여염집 출신의 김과장,이대리는 '방자'와 '향단이'가 된다.

◆'지각 면허' 받은 신입사원

지난해 모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 여직원 이모씨는 별명이 '지각면허'다. 지각을 상습적으로 하지만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다. 30분 정도 늦게 온 뒤에도 화장실로 가서는 또다시 30분간 공들여 화장을 하고 나온다. 아버지가 정부 고위 관료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해당 정부 부처와 업무상 협조 받아야 할 일이 많은 담당 팀장은 이씨 앞에서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이씨는 상습 지각의 이유로 항상 "아침에 배탈이 나서 병원에 들렀다가 늦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팀장은 매번 다정하게 "속은 괜찮아?"라고 묻는다. 같은 팀 김 대리의 뼈 있는 한마디. "팀장 지시로 한방 소화제까지 사다준 적도 있지요. '빽' 있으면 지각해도 욕은 안 먹고,한약 먹는 건가요. "

◆오후 4시에 출근하고서는…

지방의 중소 건설사에 다니는 강모 대리는 올해부터 계획에 없던 야근을 1주일에 두 번 정도 하고 있다. 같은 팀 직원으로 사장의 외아들인 김모씨가 들어온 뒤부터다. "경영 승계를 위해 여러 부서의 사정을 알아야 한다"는 사장의 방침으로 몇 년 전부터 부서를 1년씩 옮겨 다니고 있는 김모씨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다. 회사 출근시간은 빨라야 정오 무렵.보통 점심을 집에서 먹고 출근하고 오후 4시에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있다.

단순히 출근이 늦는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없지만,문제는 퇴근 무렵이다. 오후 6시가 되면 큰 소리로 "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해서 야근하겠다"고 부원들에게 공지하는 것이다. "일찍 가면 게으름 피우는 것으로 보일까봐 부장부터 시작해서 부원들이 돌아가며 1주일에 한두 번씩,일이 없는데도 같이 야근하죠.배려의 리더십을 타산지석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

◆후배 접대하기

전자회사 영업팀에서 일하는 정모 사원은 영업팀 임원이 갑자기 MP3를 구해달라고 요청해 당황했다. 거래처 선물로 쓰려면 본인이 신청서류만 따로 작성해주면 되는데 굳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몰래 구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직접 마주칠 일이 없는 임원이 사원에게 직접 전화한 것도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렵게 구해서 임원에게 제품을 넘겨준 다음날 신입사원인 박모씨가 MP3를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계열사 사장의 외동딸인 박씨는 "임원에게 선물받았다"며 수줍게 웃었지만 정씨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임원이 신입사원에게 잘 보이는 요량으로 고작 MP3를 구하느라 동분서주한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네요. "

◆'로열 금숟가락'

식품회사에 다니는 오 대리는 오너 부인의 조카다. 그는 회사 내에서 '로열 금숟가락' '슈퍼갑'으로 통한다. 직속 팀장은 물론 임원을 만나도 좀체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아 '목에 깁스'로도 불린다.

회사 내에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거래처 직원들을 만날 때는 문제다. 영업상 잘 보여야 하는 외부 사람에게도 함부로 행동하다보니 같이 일해야 하는 김 과장으로서는 여간 난처한 게 아니다. 거래처에는 오 대리 대신 사과를 구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그렇다고 '슈퍼갑'을 혼낼 수도 없다보니 속앓이만 늘어날 뿐이다. 김 과장의 한숨섞인 한마디."덕분에 늘어난 게 술과 담배네요. (오 대리가) 빨리 승진해 다른 부서로 옮겨 가기만 기도할 뿐이죠."

◆'줄'들의 전쟁

모 중견기업의 총무팀 직원들은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팀 막내 여직원들 사이의 다툼 때문이다. 보통은 직원 간의 다툼으로 부서 분위기가 험악해질 이유가 없지만 문제는 한 사람은 본부장 빽,다른 사람은 회장 빽이라는 것이다. 가운데서 중재하기 쉽지 않은 것은 물론,섣불리 한 명을 편 들거나 옹호했다가는 다른 쪽과 척을 질 수 있다는 우려에 다들 말을 아낀다. 이 부서 박 과장의 푸념."회장이 더 높기는 하지만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반면,본부장은 매일 보는 사이라 눈치를 안 볼 수 없죠.입사 연수로 10년 가까이 차이 나는 '꼬마'들 눈치를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이 더 초라해 집니다. "

노경목/고경봉/강유현/강경민/강영연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