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기 힘들었다. 토요일 오후 6시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2차선 좁은 도로 양쪽은 사람들로 꽉 찼다. '한류 성지'로 불리는 이곳.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슈퍼마켓에 김치 사러 오는 유학생이 고작이던 이 거리엔 요즘 일본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신오쿠보 거리를 걷는 일본인들의 표정은 서울 명동에 놀러온 관광객 느낌이다. 오고가는 대화도 대부분 '한국'이 주제다. "작년에 서울 놀러갔을 때 이거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더라" "한국 여자들은 김치 같은 야채를 많이 먹어 피부가 좋은 거야" 등등.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장문의 르포기사를 통해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이 '다케시타 거리(竹下通り)'처럼 일본 젊은이들의 명소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도쿄 하라주쿠(原宿)에 있는 다케시타 거리는 일본의 패션 1번지라 불리며 일본 청춘남녀들이 전통적으로 데이트를 즐기는 곳이다.

◆삼겹살 굽는 '한류 성지'

일본 언론이 주목할 만큼 신오쿠보의 인기는 요즘 급상승 중이다. '한류 바람'이 컸다. 배용준으로 시작된 한국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일본인들을 좁은 골목으로 끌어 모은 원동력이다.

신오쿠보의 인기는 지하철 이용객 수로도 드러난다. 요미우리신문은 최근 도쿄 중심가를 순환하는 야마노테(山手)선 신오쿠보역의 9월 매출이 1년 전에 비해 38% 늘었다고 보도했다. 신오쿠보역의 월간 매출은 2009년께부터 전년 수준을 웃돌기 시작했고 올 들어서는 매달 전년 대비 30% 이상의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JR(일본철도) 관계자의 말을 인용,"도심 전철역의 매출이 두 자릿수 이상 늘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전했다. 신오쿠보역은 고(故) 이수현 씨가 2001년 선로 위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한국 식재료를 파는 슈퍼를 중심으로 소박하게 출발한 이 거리는 요즘 온통 한국 가게로 점령됐다. 눈에 띄는 큰 간판은 대부분 한글로 적혀 있다. 일본말로 쓰여져 있는 간판도 잘 읽어보면 일본말이 아니다. 'オムニ(엄니)','プングム(풍금)' 등 한글을 음차한 일본말들이 태반이다.

이 중에서도 단연 인기 1위는 삼겹살집이다. '돈짱'이라는 가게 앞에는 일본 손님들로 장사진이었다. 2층에 있는 가게 정문에서부터 1층 계단을 돌아 골목까지 줄이 이어졌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라는 음식점 종업원의 설명에도 모두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다. 호떡집에도 불이 났다. 거리 곳곳을 차지한 호떡 가게에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호떡 제조과정을 들여다보는 일본인들이 가득하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손에도 호떡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거의 매주 신오쿠보를 찾는다는 유키코 씨는 "저녁을 삼겹살로 먹은 뒤 간식으로 호떡을 곁들이는 게 신오쿠보의 공식"이라고 웃었다.

◆홍초도 마시고 한국말도 배우고

일본에서 이곳에만 있는 '신오쿠보 특화형' 가게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오쿠보 갓길 한쪽에 자리잡은 '스페이스K'라는 카페가 대표적이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찻집과 똑같다. 하지만 메뉴판을 들고 찬찬히 살펴보면 독특한 서비스가 숨어 있다. 한국어 수업 코스.차를 마시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일본인들을 겨냥한 서비스다. 15분에 500엔부터 1시간 2000엔 코스까지 다양하다. 이 메뉴를 선택하면 가게에 있는 한국인 종업원이 '한국어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간혹 한류스타에게 보낼 팬레터를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는 손님도 있다. 음료수 종류도 팥빙수부터 홍초까지 한국적 색채가 강한 음료들이 주류다.

먹거리를 파는 슈퍼에도 독특한 코너가 있다. '서울시장'이라는 슈퍼에는 거의 매일 김치 시식회가 열린다. 가게 한쪽에 전시된 배추김치 오이김치 깍두기 등을 조그만 접시에 담아 맛을 보는 시스템이다. 김치 이름이 생소한 일본인들에겐 종업원들의 설명이 뒤따른다. 신오쿠보의 배달시스템도 일본인들에겐 낯설다. 짜장면과 짬뽕을 실은 오토바이가 음식점 상호를 붙이고 거리를 분주하게 오가는 장면이 일본인들의 눈엔 신기하다. 일본엔 피자 등 일부 프랜차이즈 업체를 제외하고 음식물을 배달하는 가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꽃미남 거리'에서 쇼핑을

신오쿠보를 관통하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살짝 벗어난 한 골목의 이름은 '이케멘 도리'다. 일본말로 '꽃미남 거리'라는 뜻이다. 한국 가게의 건장한 남자 종업원들이 거리로 나와 호객행위를 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이곳은 요즘 업종 다각화가 한창이다. 음식점만 몰려 있던 거리에 화장품과 옷 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오쿠보의 한류 바람이 삼겹살에서 패션 등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골목에 지난 8월 문을 연 한국화장품 전문점 '비진 코스메'의 미하라 사에코 점장은 "예상보다 손님이 많고 대량 주문도 적지 않다"며 "조만간 2호점 개점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류스타들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성업 중이다. 신오쿠보 거리의 '한류백화점'은 작년 매출이 200억원을 넘었다. 하루에 3000명가량이 가게를 찾은 덕이다.

한국 가게가 밀려들면서 터줏대감이던 일본 점포들은 하나둘 신오쿠보 거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지역 상인회 소속인 스와 씨는 "200개가 넘던 회원 가게들이 몇년 새 150개 수준으로 줄었고 상인회비 수입도 연간 800만엔 수준에서 500만엔대로 떨어졌다"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한류 바람이 너무 빨리 몰아닥쳤다"고 말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