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하던 아키하바라 되살린 '오타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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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포트 - 일본의 '마니아' 열풍
판타지 파는 비즈니스
'망가' 속 주인공 따라하기…전문 카페·커뮤니티 등장
시장규모 최대 6조원대
게임·관광·영화 등으로 확장…일본 소프트파워 원천으로
판타지 파는 비즈니스
'망가' 속 주인공 따라하기…전문 카페·커뮤니티 등장
시장규모 최대 6조원대
게임·관광·영화 등으로 확장…일본 소프트파워 원천으로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아키하바라(秋葉原) 거리. 전철역을 나서자 두 명의 여성이 전단지를 손에 쥐어주며 말을 건넨다. 순간 멈칫. ‘정상인’의 복장이 아니다. 하얀 드레스에 까만 조끼와 흰 앞치마.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머리에는 하얀 머리띠까지. 옛날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하이디’가 TV 밖으로 나온 듯하다. “‘메이드 카페’에서 차 한잔 하고 가세요.” ‘메이드 카페’는 영어로 ‘하녀’ 또는 ‘가정부’라는 뜻의 ‘메이드(maid)’에 찻집이라는 의미로 ‘카페’를 갖다 붙인 신조어다. 건널목을 건너자 ‘메이드 카페’로 꽉 찬 골목이 나타났다.
이름 모를 ‘하이디’의 안내로 한 가게의 문을 열었다. 별천지다. 벽은 온통 만화 여주인공들로 도배돼 있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메이드’들이 음료수를 나르느라 분주하다. 카페는 ‘스타벅스’보다 더 밝고 활기가 넘친다. 10대 여고생부터 50대 아저씨까지 손님도 다양하다. 자녀들과 파르페를 먹고 있는 부모들도 있다. 모두들 만화 속에 들어온 듯 즐거운 표정이다.
한때 ‘전자상가’의 대명사로 불렸던 아키하바라. 일본에 대형 전자제품 할인매장이 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는 한동안 파리를 날렸다. 이곳을 다시 살린 건 소니도 닌텐도도 아니었다. ‘루저’ 취급을 받던 ‘오타쿠(お宅·마니아)’들이 활기를 불어넣었다. ‘메이드 카페’는 부활한 아키하바라의 상징이다.
◆양지로 나온 오타쿠
오타쿠는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마니아지만, 실제로는 마니아보다 한 수 위라는 독특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애정이 유별나고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를 울릴 정도인 사람을 지칭한다.
한때는 ‘폐인’과 동의어 취급을 받았지만 요즘은 대접이 달라졌다. 일본의 독특한 오타쿠 문화가 일본 소프트파워의 원천이라는 인식이 확산돼서다.
오타쿠가 가장 많은 분야는 ‘망가’라고 불리는 일본 만화다. 오타쿠들은 만화 속 주인공을 흠모하고 대사를 따라 외우며 병적으로 집착한다. 심지어는 단체로 만화 등장인물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이처럼 열광적인 만화팬들이 일본 만화를 세계 제일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원동력이다.
전 세계 TV 애니메이션의 60%가 일본산일 정도로 일본 만화의 힘은 세다. ‘포켓 몬스터’라는 만화는 67개국에서 방영됐고 할리우드의 히트작 중 하나인 ‘트랜스포머’와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꽃보다 남자’도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일본 만화 ‘나루토’의 주인공 ‘나루토’는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가 존경하는 일본인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한류’에 맞서기 위해 기획한 ‘쿨재팬(Cool Japan)’ 프로젝트도 기반은 만화다. ◆오타쿠, 비즈니스가 되다
만화를 중심으로 한 ‘오타쿠 문화’는 하나 둘 ‘비즈니스’로 탈바꿈했다. 만화 속 판타지를 돈을 받고 파는 시스템이다. 아키하바라를 점령한 ‘메이드 카페’가 단적인 예다. ‘메이드 카페’는 어느 곳을 가도 영업방식이 똑같다. 목표는 손님들에게 최대한 만화 주인공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 카페를 들어설 때 들려오는 인사부터 다르다. 보통의 가게는 ‘어서오세요(이랏샤이마세)’라고 하지만 이곳은 ‘다녀오셨어요(오카에리나사이)’라고 한다. 손님을 부를 때도 남성일 경우엔 ‘주인님(고슈진사마)’, 여성에겐 ‘공주님(오조사마)’이라고 한다. 계산을 하고 카페를 나서면 ‘다녀오세요(잇테랏샤이)’라는 인사말이 따라 붙는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고 해서 그냥 손을 대면 안 된다. 메이드가 음식에 ‘맛있어지는 마법’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에 모에 콩…”이라는 묘한 주문을 외운다. 주문의 2절은 손님도 따라해야 한다. 두 손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고 가슴의 이쪽저쪽을 오가는 제스처도 필수다. 민망해서라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곳의 손님들은 이런 재미를 즐기고 거기에 돈을 지불한다.
오타쿠 문화의 파괴력은 ‘메이드 카페’ 같은 소규모 자영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게임 정보기술(IT)기기 관광 영화 등 여러 산업이 오타쿠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일본 시장조사기관인 미디어크리에이트가 2008년 발간한 ‘오타쿠 산업백서’에 따르면 오타쿠 시장 규모는 1866억엔으로 추산된다. 요즘 환율로 2조8000억원이 넘는 돈이다. 노무라종합연구소는 한술 더 떠 시장 규모가 4000억엔(6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콘텐츠 왕국’ 일본의 원천
2003년 뉴욕의 한 경매시장에 눈길을 끄는 작품이 선보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몰두해온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가 내놓은 미소녀 피규어(만화 등장인물을 모방한 인형)인 ‘미스 코코’. 이 작품은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50만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일본 현대 미술작품으로는 당시 최고액이었다. 3류 취급을 받던 ‘오타쿠 문화’가 ‘예술작품’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우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오타쿠 문화는 19세기 말 서양 인상파 화가들이 열광한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 이후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일본 문화”라고 평가했다.
오타쿠 문화는 최근 들어 인터넷 공간으로도 확장됐다. ‘해킹에서 오늘밤 안주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한 ‘2채널(www.2ch.net)’은 오타쿠들의 인터넷 집합 장소로 출발해 지금은 일본 최대 커뮤니티 사이트로 성장했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한 거래도 활발하다. 일본 상품 구매대행 사이트 ‘재팬앤조이’의 김현준 사장은 “판매된 지 오래된 로봇 장난감은 수백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일본 문화 전문가인 이진천 씨는 ‘21세기 신문화의 리더, 오타쿠’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콘텐츠 왕국 일본의 뒤에는 오타쿠가 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이름 모를 ‘하이디’의 안내로 한 가게의 문을 열었다. 별천지다. 벽은 온통 만화 여주인공들로 도배돼 있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메이드’들이 음료수를 나르느라 분주하다. 카페는 ‘스타벅스’보다 더 밝고 활기가 넘친다. 10대 여고생부터 50대 아저씨까지 손님도 다양하다. 자녀들과 파르페를 먹고 있는 부모들도 있다. 모두들 만화 속에 들어온 듯 즐거운 표정이다.
한때 ‘전자상가’의 대명사로 불렸던 아키하바라. 일본에 대형 전자제품 할인매장이 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는 한동안 파리를 날렸다. 이곳을 다시 살린 건 소니도 닌텐도도 아니었다. ‘루저’ 취급을 받던 ‘오타쿠(お宅·마니아)’들이 활기를 불어넣었다. ‘메이드 카페’는 부활한 아키하바라의 상징이다.
◆양지로 나온 오타쿠
오타쿠는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마니아지만, 실제로는 마니아보다 한 수 위라는 독특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애정이 유별나고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를 울릴 정도인 사람을 지칭한다.
한때는 ‘폐인’과 동의어 취급을 받았지만 요즘은 대접이 달라졌다. 일본의 독특한 오타쿠 문화가 일본 소프트파워의 원천이라는 인식이 확산돼서다.
오타쿠가 가장 많은 분야는 ‘망가’라고 불리는 일본 만화다. 오타쿠들은 만화 속 주인공을 흠모하고 대사를 따라 외우며 병적으로 집착한다. 심지어는 단체로 만화 등장인물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이처럼 열광적인 만화팬들이 일본 만화를 세계 제일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원동력이다.
전 세계 TV 애니메이션의 60%가 일본산일 정도로 일본 만화의 힘은 세다. ‘포켓 몬스터’라는 만화는 67개국에서 방영됐고 할리우드의 히트작 중 하나인 ‘트랜스포머’와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꽃보다 남자’도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일본 만화 ‘나루토’의 주인공 ‘나루토’는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가 존경하는 일본인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한류’에 맞서기 위해 기획한 ‘쿨재팬(Cool Japan)’ 프로젝트도 기반은 만화다. ◆오타쿠, 비즈니스가 되다
만화를 중심으로 한 ‘오타쿠 문화’는 하나 둘 ‘비즈니스’로 탈바꿈했다. 만화 속 판타지를 돈을 받고 파는 시스템이다. 아키하바라를 점령한 ‘메이드 카페’가 단적인 예다. ‘메이드 카페’는 어느 곳을 가도 영업방식이 똑같다. 목표는 손님들에게 최대한 만화 주인공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 카페를 들어설 때 들려오는 인사부터 다르다. 보통의 가게는 ‘어서오세요(이랏샤이마세)’라고 하지만 이곳은 ‘다녀오셨어요(오카에리나사이)’라고 한다. 손님을 부를 때도 남성일 경우엔 ‘주인님(고슈진사마)’, 여성에겐 ‘공주님(오조사마)’이라고 한다. 계산을 하고 카페를 나서면 ‘다녀오세요(잇테랏샤이)’라는 인사말이 따라 붙는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고 해서 그냥 손을 대면 안 된다. 메이드가 음식에 ‘맛있어지는 마법’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에 모에 콩…”이라는 묘한 주문을 외운다. 주문의 2절은 손님도 따라해야 한다. 두 손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고 가슴의 이쪽저쪽을 오가는 제스처도 필수다. 민망해서라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곳의 손님들은 이런 재미를 즐기고 거기에 돈을 지불한다.
오타쿠 문화의 파괴력은 ‘메이드 카페’ 같은 소규모 자영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게임 정보기술(IT)기기 관광 영화 등 여러 산업이 오타쿠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일본 시장조사기관인 미디어크리에이트가 2008년 발간한 ‘오타쿠 산업백서’에 따르면 오타쿠 시장 규모는 1866억엔으로 추산된다. 요즘 환율로 2조8000억원이 넘는 돈이다. 노무라종합연구소는 한술 더 떠 시장 규모가 4000억엔(6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콘텐츠 왕국’ 일본의 원천
2003년 뉴욕의 한 경매시장에 눈길을 끄는 작품이 선보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몰두해온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가 내놓은 미소녀 피규어(만화 등장인물을 모방한 인형)인 ‘미스 코코’. 이 작품은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50만달러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일본 현대 미술작품으로는 당시 최고액이었다. 3류 취급을 받던 ‘오타쿠 문화’가 ‘예술작품’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우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오타쿠 문화는 19세기 말 서양 인상파 화가들이 열광한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 이후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일본 문화”라고 평가했다.
오타쿠 문화는 최근 들어 인터넷 공간으로도 확장됐다. ‘해킹에서 오늘밤 안주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한 ‘2채널(www.2ch.net)’은 오타쿠들의 인터넷 집합 장소로 출발해 지금은 일본 최대 커뮤니티 사이트로 성장했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한 거래도 활발하다. 일본 상품 구매대행 사이트 ‘재팬앤조이’의 김현준 사장은 “판매된 지 오래된 로봇 장난감은 수백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일본 문화 전문가인 이진천 씨는 ‘21세기 신문화의 리더, 오타쿠’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콘텐츠 왕국 일본의 뒤에는 오타쿠가 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