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족보ㆍ스터디에 월차 내서 벼락치기…"학창시절 이랬으면 S대 갔을텐데"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박모 대리(31)는 최근 헬스클럽에 등록하고,엉덩이와 허벅지 지방 분해에 효과적이라는 다이어트 보충제도 박스째 구입했다. 지난주 승진시험이 끝나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학교 다닐 때보다 승진시험이 훨씬 더 신경이 쓰여요.이건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거 잖아요.시험준비한다고 앉아서 공부하다보니 운동도 못하고,스트레스 받으면 더 먹고 했더니 살이 뒤룩뒤룩 쪄버렸네요.”

수학능력시험은 몇 주 전 끝났지만 김과장 이대리들의 시험은 이제 시작이다. 여러 기업과 공공기관의 승진시험이 11월 말부터 12월 사이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입사동기나 후배에게 물먹지 않기 위해 퇴근 후나 주말이면 도서관ㆍ독서실에서 수험생 생활을 보내는 김과장 이대리들. 시험에 쏟는 열정만큼이나 그에 얽힌 사연도 눈물겹다.

◆승진 고시

초·중·고등학교 12년, 대학 4년을 공부한 직장인들에게 승진시험은 그동안의 노하우를 총동원해야 할 때다. 물론 가장 대중화된 비법은 ‘벼락치기’. SK그룹의 일부 계열사 과장들은 팀장 자격시험을 앞두고 2~3일 휴가를 낸다. 이른바 ‘선경경영관리체계(SKMS·Sunkyoung Management System)’를 공부하기 위해서다. SKMS는 1970년대부터 구체화된 SK그룹의 경영관을 100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정리한 것으로,달달 외울 정도가 돼야 시험에 응할 수 있다.

SK텔레콤의 경우 ‘SK가 요구하는 리더의 자질을 SKMS에 근거해 논하시오’ ‘SK가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을 논하시오’ 등으로 출제돼 SKMS를 완벽 숙지하지 않고서는 세 줄 이상 쓸 말이 없다고 한다.SK텔레콤의 이모 과장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승진 시험이 로스쿨 시험만큼이나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며 “상사들도 자신이 겪은 고통을 기억하는 만큼 시험 1주일 전부터는 업무에서도 빼주고 휴가도 선뜻 허락해 준다”고 말했다.

대학시절 학과시험이나 입사시험을 준비할 때 활용했던 스터디그룹도 다시 등장한다. 업무와 공부를 병행하기 힘들다보니 승진시험 범위를 분담해 정리하고,이를 공유하는 식이다. 보통 4~5명으로 이뤄지는 스터디는 시험분량을 범위별로 나눠 공부하게 된다. 정유회사에서 일하는 김모 과장은 “보통 동기들 사이에 조직되는 스터디그룹은 승진 시험 이후에도 좋은 인맥이 된다”며 “다만 스터디그룹 내에 한두 명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뒷풀이 때부터는 벌써 직급이 달라지다보니 서먹해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시험이 그렇듯 승진시험에도 ‘족보’는 필수다. 회사마다 한두 명씩은 있는 ‘시험의 고수’나 전설적인 스터디그룹이 집대성한 족보는 대대로 이어지며 후배 승진 대상자들의 소중한 ‘양식’이 된다. 시험 공부보다는 양질의 족보를 확보하느냐 여부가 당락을 좌우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족보 제공자가 동기들에게 한턱 대접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뛰는 놈 위에,나는 놈’

김과장 이대리들이 승진 시험을 위해 열을 다하다보니 각종 ‘꼼수’가 등장하게 마련이고, 이를 막기 위한 회사의 노력도 처절하다.

최근 승진시험의 대세는 인터넷 시험. 서면시험에 비해 시험내용이 유출되기 쉽지 않은 데다 같은 시험이라도 응시자마다 각각 다른 구성의 시험문제를 풀어야 하는 만큼 커닝을 막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한 유통업체는 과장과 부장 등 간부급 승진을 위한 영어면접 시험에 예상문제 족보가 나돌자 컴퓨터로 진행되는 말하기 평가인 오픽을 도입했다. 무작위로 선택된 질문에 직원들이 답하고 해당 내용을 녹음해 보내면 등급이 나오는 방식이다.부장 승진을 앞둔 최모 과장은 “예전에는 예상문제의 답만 달달 외우면 됐지만 지금은 주말에 5시간씩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토로했다.

시험을 온라인으로 진행한다고 해서 맹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대형 식품회사의 과장 승진 시험은 마케팅,윤리경영,재무,혁신 등 네 과목에 대해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마케팅팀의 정모 대리는 마케팅과 윤리경영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지만,재무와 혁신 과정이 고민이었다.궁즉통(窮卽通). 온라인 시험 과정에서 응시자가 앉은 자리의 인터넷프로토콜(IP)만 체크할 뿐 따로 감독하는 사람이 없다는 데 착안하게 됐다. 정 대리는 재무팀 동기와 짜고,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마케팅과 재무 시험을 대신 봐줬다. 몇 차례 시험을 거치며 이런 꼼수가 성행하게 되자 회사 측은 시험 방식을 바꾸는 것을 궁리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주경야독으로 준비했는데…

농협중앙회의 승진 대상자들에게 지난해 연말은 수난 기간이었다. 몇 달간에 걸쳐 시험을 준비했지만 구제역 발병으로 승진시험 자체가 연기된 것. 구제역 확산 방지에 농협 직원들까지 동원되면서 시험이 두 차례 연기된 끝에 구제역이 잠잠해진 올 3월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 올해 시험을 본 고모씨는 “시험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던 만큼 시험이 연기되는 와중에도 시험공부는 계속해야 했다”며 “낮에는 구제역 방제활동,밤에는 승진시험 공부를 하느라 스트레스가 파도처럼 밀려왔던 4개월”이라고 회고했다.

대기업 직원 정모 과장에게 2009년 승진시험은 일생일대의 위기가 됐다. 시험 공부를 하느라 1주일에 한 번씩은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기를 한 달, 몸을 도저히 가눌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가 간암 진단을 받았다. 공부한 게 아까워 시험은 치르고 수술을 받으려 했지만,어이없게도 그해는 승진시험이 없어졌다. 작년 시험은 투병을 하느라 응시도 못했던 정 과장은 이제 건강을 되찾아 다음달 승진시험에 재도전한다. “꼭 승진시험 때문이라고 하기까지는 어렵지만 암까지 걸려가며 준비한 시험이 연기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투병 중에도 틈틈이 공부를 한 만큼 시험 통과는 힘들지 않을 것으로 자신합니다.”

노경목/윤성민/윤정현/강유현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