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유연한 對北정책? 실용주의 꼴 난다
원칙과 이념,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 이 정부의 부박(浮薄)한 기질이다. 임기응변이 주특기요 상황에 따라 편한대로 대처한다. 내곡동 사건도 그런 결과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앞둔 시점에 이 칼럼에서도 우려했듯이 실용주의는 그렇게 4년 동안 무정부적 혼란상만 심화시켜 왔다. 이념의 난교(亂交)라고 부를 만한 과정이다. 정치가 나꼼수니 청춘콘서트니 하는 어린애들 놀이터로 전락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아무런 주장이나 우기면 그만이고 짓까부는 블랙 코미디가 정치 공론인양 둔갑한 것도 권력이 소위 실용주의라는 노선도 아닌 노선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 문제에 대해 이런 오류를 되풀이하겠다는 것이 소위 유연한 대북정책론이다.

미·중과는 달리 한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결코 현상유지 전략으로 갈 수 없다. 북한의 민주화, 시장제도 도입, 대외개방과 내부개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북한과 대화하고 김정은의 병정놀이를 지원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중국이 김정은을 초청해 역사상 유례없는 3대 세습 독재를 정당화한다고 우리가 이를 추종해야할 이유도 없다. 중국이 북한을 동북 4성으로 편입한다면 이를 수용할 것인가. 이해관계의 본질부터 다르다. 미국과 중국이 김정은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국내 좌파들이 일제히 조문외교 기회를 왜 놓치느냐고 MB 정권을 공박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한국의 대북 전략도, G2 외교도 길을 잃고 만다.

미국은 지금 북한 문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새해초부터 시리아에 군사개입을 해야할 판이고 내년 중반에는 이스라엘과 이란 간에 전쟁이 예고돼 있다. 10년에 걸쳐 진행돼온 소위 악의 축 정리작업이 완결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건 오바마나 부시의 문제가 아니다. 우라늄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이 24만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키로 한 것이 김정일이 죽던 지난 17일이다. 중국도 다급하다. 미국의 태평양 포위전략에 대한 유일한 범퍼가 북한이다. 이들 강대국의 하위 전략 개념으로 한국의 정책을 조정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강성대국과 선군정치라는 것이 북한의 유일한 전략이다. 이는 국가 전략으로 포장된 김정일 집단의 체제 유지 전략이다. 한국을 핵 인질로 잡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김정일 일가의 세습 독재를 확고하게 보장받겠다는 저급한 인질 전술이다.

[정규재 칼럼] 유연한 對北정책? 실용주의 꼴 난다
소위 종북세력은 인질 생활이 장기화하면서 생겨난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들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이 인질범에 동화되면서 오히려 경찰을 증오하게 되고 인질에 협조하게 된다는 일종의 정신착란 현상을 말한다. 유연한 대북정책론은 인질 증후군 환자들의 흰소리를 정책인 것처럼 둔갑시키게 된다. 소위 햇볕 정책과 퍼주기 정책이 불러온 정신병리학이다. 인질범에게 돈을 주는 것은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와 목표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햇볕 정책으로 건넨 뇌물이 결국 핵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전략은 미국이나 중국이 세우고 비용은 한국이 댄다는 것이 그동안의 대북외교 골격이었다. 돈을 내는 것은 좋다. 그렇다면 전략도 한국이 세워야 한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북한 침식이 장기화되고 있어 한국의 레버리지가 약화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한 가지 더한다면 북한이 붕괴되는 것보다 중국이 정치갈등 끝에 천하대란적 상황으로 몰리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한반도 주변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예단할 수 없다. 예단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보편적 원칙이다. 한국의 주장이 분명해야 G2도 북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무언가가 생긴다. 미국과 중국이 한국의 원칙과 고집에 큰 부담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불타협의 원칙을 세워야 비로소 타협점이 열린다. 유연성이나 로 키(low key) 운운하는 것은 무정견과 기회주의를 은폐해보려는 허망한 말장난이다. 이 정부의 무개념에 더 이상 무슨말을 해야하나.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