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여전히 우리가 낙관론자인 이유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여자는 이브라고 한다. 시어머니가 없었다는 이유다. 그 다음으로 행복했던 여자는? 답은 마리아다. 며느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객쩍은 농담이다. ‘요즘 며느리’를 개탄하는 것은 시어머니들의 오랜 사고편향일 뿐이다. 요즘 신입사원이든 요즘 신입생이든 대체로 비슷한 이유로 매도 당하기 십상이다. 타락하고 악화되고 말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은 그렇게 끈질기게 우리의 뇌를 지배한다. ‘요즘 자본주의’ 논쟁도 마찬가지다. 지식인을 자처하려면 일단 ‘요즘 자본주의’부터 딴죽을 걸고봐야 한다.

쏟아지는 전망이나 예언들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비관적 전망이라야 그럴 듯하게 들린다. 빗나가면 그만이고 잘하면 예언자도 된다. 점쟁이가 경우의 수를 대비해 부적을 팔아 놓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말의 공포가 없다면 점집의 돗자리는 말아야 한다. 사실 잘될 것이라는 얘기에는 누구도 복채를 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문학적 텍스트들이 과거를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도 같은 논리다. 루소의 소위 ‘고상한 야만인’부터가 그렇고 혹 주인공이 영웅이라면 필시 고대에 살았던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도 그렇다. 좋았던 과거와 미심쩍은 앞날은 그렇게 대비된다. 아름다운 과거는 파국적 미래를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일 뿐이다.

비관론에 비해 낙관론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예언은 우선 짜릿한 맛부터가 없다. 더구나 종종 기득권을 정당화한다. 이 때문에 낙관론적 논리구조를 가진 사회비판은 거의 없다. 정치나 강단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뇌에 찬 교수라야 대학생의 존경을 받지 않겠는가. 누가 더 과장된 어법으로 미래를 저주하는지가 대중의 인기와 표를 좌우한다. 파국을 예언하는 것만큼 좋은 득표 전략은 없다. 종말론적 저주는 중세 말에도 대유행이었다. 루소로부터 그의 제자인 마르크스를 거쳐 지금도 좌익들의 굳건한 지적 전통을 구성한다.

좌편향 언론은 자본주의 종말을 설파하고 정치는 거짓 구원을 약속한다. 정치와 언론은 적대적이지만 동시에 오랜 동업자다.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빈자로 양극화된 끝에 기어이 자본주의가 해체될 것이라는 명제는 너무 도식적이다. 언론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루라도 듣지 못하면 오히려 불편할 정도다. 하지만 이 예언은 언제나 과녁을 빗나갔다.

경기후퇴가 있을 때마다 자본주의 아마겟돈을 우려하지 않은 예언자는 없었다. 그리고 점쟁이들은 또 부적을 팔았다. 그러나 케인스의 부적조차 자본주의를 구하는 데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 요즘 또 다시 종말론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지금이야말로 세계 자본주의가 가장 왕성하게 작동하는 중이다. 최근 2,3년만 해도 그렇다. 종말론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구는 종전보다 더 정의롭고 더 아름다워졌다. 이슬람과 아프리카가 긴 혼돈에서 깨어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전환하고 있다. 종교와 억압으로부터의 피눈물 나는 여정이었다. 20년 전에 구소련과 동구권이 그랬듯이 지금 이슬람권에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다. F·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 2부를 새로 써야 마땅하다. 비탄이 아니라 해방의 열기가 중동을 흔들고 있다. 보편가치의 확산이 아니라 문명 간 충돌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새뮤얼 헌팅턴이 오류를 시인할 수 없게 된 것은 실로 유감이다.

최근의 유럽 재정위기조차 실은 자유시장 체제의 정의가 실현된 결과다. 열심히 일하는 중국과 인도의 형편이 펴지고, 포퓰리즘에 절어 있는 게으른 남유럽이 시장의 벌을 받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서구적 어법을 빌려서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이요 신의 간지(奸智)다. 한국에서 그랬듯이 지금 아랍과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중국과 인도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진정 ‘거대한 전환’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법칙이므로 머지않아 북한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결코 장기적 비관론에 빠지지 않는 이유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