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국회의원 선거가 뚜렷한 쟁점 없이 막을 내렸다. 야권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발효’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제동을 걸었지만 효과가 없었고, 여야가 모두 수백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복지비로 쓰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막말’도, ‘게이트’도, ‘색깔’도 선거판을 좌우하지는 못했고, 북한이 ‘로켓’을 쏘아 올린다고 해도 신경쓰는 이는 많지 않다. 특이한 것은 여야가 모두 엄살을 떠는데 그렇다고 꼭 선거에서 완승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선거를 치른 것일까? 이념도, 정책도, 네거티브도 힘을 쓰지 못한 것은 확실한데 그렇다면 무엇일까? 승패 분석에만 매달리고 ‘진보 대 보수’로만 세상을 재단하면 보이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정체불명의 현상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선거과정에서 주류가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후보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실질적 주류, 즉 실세가 등장했는데 이름하여 ‘부동층’과 ‘무당파’이다.

이들은 노무현, 이명박, 박원순을 차례로 당선시킨 실세였다. 이념도, 지역도, 정책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새로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바랐을까? 물론 새로운 정치다. 하지만 두 대통령은 선거과정에서 얻은 범국민적 지지를 오해하는 바람에 통치과정에서 그 지지를 다 날려버렸다. 그래서 유권자는 또 새 사람을 찾아 나선다.

도끼에 발등을 찍히더라도 새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을 필자는 ‘도덕감정’이라 부르고 이를 구현하는 정치를 ‘도덕정치’라 불러본다. 이 말에 벌써 눈살을 찌푸리는 분이 있을 것이다. “도덕과 정치를 섞다니 말이 되나, ‘SNS(쇼셜네트워크서비스)질이나 하는 선동꾼들’을 도덕적이라고 하다니 말도 안 돼.”

필자는 여기서 한국 유권자의 도덕적, 정치적 기대와 관련하여 새로운 개념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여야로 갈리고 진보와 보수로 나누고 나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부동층, 무당파들과 달리 ‘정치적 주름살’이 많은 사람들이다. 식민지배, 냉전체제, 지역감정의 동원은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 사태를 항상 패싸움의 구도 속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무당파와 부동층은 세대를 불문하고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지지하는 정당도 부담 없이 바꾸고 또 왔다 갔다 한다.

주름살이 없는 부동층, 무당파의 정치적 계산 방식은 주류 정치학 교과서가 가르쳐 주는 방식이 아니다. 우선 ‘카리스마’가 있다고 사람을 찍어주지 않는다. 신비주의 전략은 냉소를 낳을 뿐이다. ‘찍어주면 뭐 줄래’라는 식의 계산도 어불성설이다. ‘그냥 하던 대로 하지’는 북한의 김정은이 세습하는 방식인데 말이 안 된다.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계산방식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제 걱정 마시고 나라일 먼저 보세요’이다. 이런 계산을 하는 사람들이 주류는 아니지만 이제 한국정치의 실세가 되어가고 있다. 이들의 행실이 도덕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도덕정치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정치가들이 늘 도덕적일 것이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사람을 잡으려고 도덕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은 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정치가가 진정성만 보여주면 결과야 어떻든 감동하고, 솔직하기만 하면 용서도 잘하는 사람들이다. 이것 또한 이들이 소통하는 방식이다.

사실 정치권이 이들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4·11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이들 앞에서 떨었고(이합집산 행태, 물갈이를 보라), 12월에 있을 대선이 벌써부터 공포로 다가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 정치적 중산층이 ‘색깔 공방’과 ‘네거티브 전략’과 ‘포퓰리즘’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정치의 희망, 바로 여기에 있다.

조중빈 < 국민대 정치학 교수 cbc@kookmi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