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체육대회 과자따먹기ㆍ출근부에 도장 꾹~ "이거 다 어디갔어?"
1980년대 대부분의 직장 사무실에서 직원들은 모두 한쪽 방향을 향해 앉은 채 근무했다. 맨 앞줄에 신입사원과 주임이 사무실 입구를 향해 앉으면 대리가 그 뒷자리에 앉아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과장은 하루종일 대리들의 등을 보면서 일했다. 그 과장들의 뒤에는 차장, 부장이 앉았다. 왜 그랬냐고? 피감시자들은 감시자가 자신의 시야에서 안 보일 때 가장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회사 업무가 상하급자 간 소통과 협업이 아니라 일방적인 감시와 지시를 통해 이뤄지던 시절 얘기다.

남자직원들은 ‘미스터 김’ ‘미스터 박’으로 불리고 여직원들은 ‘미스 리’로 불리던 시절. 월급날, 한 달에 한 번 미스 리가 총무팀에서 노란색 월급봉투를 수령해와 직원들에게 나눠주면 드라마의 한장면처럼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입구에는 주변 식당과 술집의 ‘이모’들이 진을 치곤 했다.

등 뒤에 앉아 계시던 부장님, 도도하기 그지없던 미스 리, 회사 입구에서 외상장부를 손에 쥐고 환한 미소를 날리던 이모님. “그거 다 어디갔어?”하는 한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처럼 정말 다들 어디 가셨을까. 요즘의 김 과장, 이 대리들은 공감하기 힘든 그때 그 시절의 김 과장, 이 대리들의 모습을 되돌아 보자.

○“복사기 이용하려면 결재 받고 오세요”

단조업체인 성창공업의 김정철 사장 집 서재에는 빛바랜 텔렉스 한 대가 놓여 있다. 그가 첫 번째로 근무했던 회사에서 폐기처분한 물건을 집에 모셔놓고 있다. 텔렉스를 보고 있노라면 무역회사 초년병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찌익찌익거리는 특유의 소음과 함께 해외 바이어들로부터 각종 인콰이어리(수출문의)나 주문서,신용장이 텔렉스를 통해 들어왔다. 텔렉스가 도착하면 밤 늦게까지 남아 챙기고 번역하던 게 그의 업무였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텔렉스는 ‘잘나가는 회사’의 상징이었다. 당시로서는 수백만원대의 고가이다 보니 웬만한 중견기업도 갖추기 힘들었다. 당시 한국경제신문 지면에도 “△△사가 텔렉스를 구입, 수출 기반을 마련했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다. 수출에 목마른 중소기업들은 조합이나 공단 차원에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공용 텔렉스를 마련하곤 했다. 김 사장은 “1980년대 초 사무실 책상 위엔 두 사람당 한 대꼴로 전화기가 있었다”며 “텔렉스와 전동타자기는 여러 부서가 공유하는 것이었고 복사를 하려면 결재를 받아 신청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너희가 출근도장을 아느냐”

“출근부에 도장 찍는다”는 말이 관용어로 쓰이지만, 요즘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출근 도장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1980~1990년대 대부분의 직장은 출근부 자신의 이름 옆에 각도장을 찍어야 했다. 출근 데드라인인 9시가 되면 저승사자처럼 총무부 직원이 나타나 출근부를 회수해간다. 뒤늦게 총무부 미스터 정을 찾아 아무리 읍소를 해도 소용없다. 출근도장이 찍혀야 될 자리에는 총무부장의 ‘지각’도장이 찍힌다.

이렇게 출근해 테두리에 고무패드를 두른 회색빛 철제책상에 앉는다. 지금 머그컵과 컴퓨터 마우스, 휴대폰 홀더가 놓여 있는 책상 위에는 도장과 인주, 고무인과 스탬프, 하루씩 넘기는 탁상용 일일달력, 검은색 표지에 테두리가 붉은 장부, 전자계산기(1980년대는 주판) 등이 있었다. 자도 당시에는 필수품이었다. 서류 작업을 하는 데 일일이 선을 그으려다 보면 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당시 손글씨가 예쁜 사원은 인기가 최고였다. 반대로 악필은 일을 아무리 잘해도 꼭 핀잔을 들었다.

○글벗,장원,보석글,명필… “이거 다 어디갔어?”

지금 김 과장, 이 대리들은 문서작업을 하면 으레 한글 프로그램이나 MS오피스의 워드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하지만 업무용 PC가 사무실에 막 보급되던 1980년대 후반 직장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워드프로세서를 썼다. 당시 8비트, 16비트 컴퓨터에 맞춰 출시된 삼성전자의 글벗, 금성사(현 LG전자)의 장원, 삼보컴퓨터의 보석글, 고려시스템의 명필 등이다. 이들 소프트웨어 등을 담았던 1.2메가바이트(MB) 용량의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는 사무실의 필수 아이템 중 하나였다. 그때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지금 일반적으로 쓰이는 수십 기가바이트(GB)의 USB메모리를 상상이나 했을까.

○반주없이,가사없이 노래하던 그때

1980,1990년대는 직장인의 이벤트 문화도 지금과 사뭇 달랐다. 회사 체육대회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아이템이 여장남자 응원단과 과자 따먹기.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체육대회 비용 절약에 급급한 일부 회사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다. 밀가루판에 숨겨놓은 떡을 먹은 후 달리는 모습도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회사 주변의 각종 주점들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탄을 때 고기를 굽던 예전 모습의 고깃집이 복고바람을 따라 생겨나긴 했지만 테이블 모서리의 이가 잔뜩 빠진 술집 골방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노래방이 없던 시절 노래를 좋아하던 김 과장과 이 대리들은 이곳에서 나무젓가락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두들기며 목청을 뽑았다. 노래를 안 하고 점잔을 빼는 직원들은 “노래를 못하면 시집을 못 가요…”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등의 가락으로 압박을 받아야 했다.

○‘30대는 공감 가능’ 삐삐, 700서비스

“전철 안이라 삐삐를 못 받았어요.” 1990년대 중반 영업사원들이 상사의 삐삐(무선호출기) 호출을 실수로(때로는 일부러) 놓쳤을 때 가장 많이 했던 변명 중 하나다. 물론 지금은 절대 통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삐삐는 1990년대 초만 해도 영업사원 등 일부 외근직원들이 사용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전 국민의 필수품으로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당시 테이블마다 삐삐 호출 전용 전화기가 놓여 있던 커피숍들은 영업맨들의 개인 사무실이 되기도 했다.

전화선을 이용한 데이터 전송이 활기를 띠면서 700 전화서비스도 직장인들의 인기를 누렸다. 야구광인 한 광고회사 김 상무는 1990년대 회사에서 야근 때면 몰래 전화기를 들고 ‘700’을 누르던 기억을 떠올린다. TV나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를 시청하기 힘들지만 700 서비스는 실시간으로 경기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요긴한 수단이었다. 김부장은 “30초에 50원이나 하던 700 요금 때문에 늘 회사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경기 중계뿐만 아니다. 인터넷이 없었던 그때 그 시절에는 전화기 버튼을 이용해 음성으로 바둑을 두거나, 인기가요나 개그를 듣고, 게임도 즐겼다. 기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활의 패턴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 미래의 위대한 유산 1순위 '등산'

직장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과거 직장생활의 향수는 ‘집들이와 같이 동료들과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행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조사업체 엠브레인이지서베이가 직장인 489명을 대상으로 지난 19~23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1.7%가 이처럼 답했다. 이어 △두꺼운 월급봉투(33.9%) △팩스, 타자기 등 아날로그식 장비들(6.5%) △사무실 안의 재떨이(5.7%) △토요일 근무할 때 끝나고 먹던 낮술(4.9%) △종이 결재서류(4.3%) 등의 순이었다. 반면 이 중에서 사무실 내 재떨이는 직장인 10명 중 6명이 없어져서 잘됐다고 여기는 과거 잔재로도 꼽혔다.

직장인이 미래에 ‘위대한 유산’이 돼 없어지길 바라는 직장 문화 1순위는 ‘등산 등 회사 친목행사’(45.6%)로 나타났다. 특히 이 질문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없어지기를 희망하는 강도가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원급은 ‘등산 등 친목행사’ 폐지론이 36.3%였지만, 차장급 이상에서는 이런 반응이 절반을 웃돌았다. 이어 △유니폼(17%) △사원증(16.8%) △사무실 안 지정 좌석(11%)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5.9%) 등도 미래에 ‘위대한 유산’으로만 남길 바라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경봉/김일규/윤정현/정소람/강영연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