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화랑인 갤러리 현대가 화랑업계 최초로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었다.

갤러리 현대는 30일 조정열 전 K옥션 대표(45)를 새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했다. 박명자 회장의 둘째아들인 도형태 전 사장은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 회장은 전문경영인 발탁 배경에 대해 “1세대 화랑 주인으로서 전시기획 사업의 초석을 닦는 역할을 해왔지만 경영이라는 측면은 또 다른 것이어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갤러리 현대 측은 “향후 10년, 20년을 준비하는 자세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며 “전문경영인과 오너의 역할을 구분하고 각자 전문성을 살려 조직 안에서 유연하게 소통함으로써 더욱 체계화되고 전문화된 기업으로 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0년부터 미술시장의 산파 역을 해온 갤러리 현대는 박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2006년부터 둘째아들 도형태 씨가 사장을 맡으면서 ‘모자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도 전 사장은 미술품 전시 판매 등 핵심 사업 강화와 함께 국내 작가의 해외 프로모션, 미래 사업 투자 확대, 포트폴리오 다변화 등 신성장동력 확보에 주력하며 사세를 넓혔다.

신임 조 사장은 지난해 3월 미술품 경매회사 K옥션 사장으로 발탁돼 미술계에 첫발을 들여놨다. 이화여대 대학원 졸업 후 20여년간 한국유니레버와 한국로레알, 세계적인 제약회사 미국 머크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전략마케팅 상무, 한국피자헛 상무 등 다국적 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마케팅·영업 전문가.

그는 “다국적 기업에서 20여년간 터득한 것은 빠른 시일 내 영업성과를 올리는 것이었다”며 “2~3년 안에 갤러리 현대를 세계 굴지의 화랑으로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의 전문경영인으로서 일관성 있는 경영 시스템을 도입, 조직 효율성과 영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장기적 경영 비전 및 전략을 수립할 계획이다.

마케팅 전문가로서 미술계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서는 “최고경영자가 어떤 트렌드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그 사업에 대한 열정과 확신,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며 “생활용품에서 의약품, 음식까지 전혀 성격이 다른 제품들을 판매한 경험에 비춰보면 미술 비즈니스야말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4년 전 갤러리 현대에서 황규백 씨의 소품을 구입한 게 미술과의 첫 만남이었다는 그는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그때 느꼈다”며 “대기업에서 배운 마케팅 기법을 적용하면 미술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K옥션 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 만에 경매 낙찰률 76%, 낙찰액 240억원을 기록하며 마케팅 능력을 과시했다.

‘가족기업’으로 출발한 갤러리 현대가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자 화랑업계는 놀라고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서구 화랑의 추세와 다른 경영 실험이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가족이나 친족이 대다수 지분을 소유하고 경영권까지 장악하면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며 “현대의 전문경영인 도입은 기업의 최대 이윤 창출과 최적의 의사결정을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변화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동안 화랑업계는 밑바닥에서 경험을 쌓아 자수성가한 1세대 화상이 2선으로 물러나거나 타계하면서 국내외에서 미술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2세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국제갤러리, 가나아트갤러리, 예화랑, 선화랑, 진화랑, 표화랑 오너의 자녀들이 화랑업계 리노베이션을 이끌고 있지만 이번 변화를 계기로 일부 업체가 전문경영인을 영입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김윤섭 미술경영연구소장은 “화랑 경영인들이 60~70세가 넘으면 일선에서 물러나고 회사의 주요 포스트에 자녀를 등장시킨 후 실적 등을 통해 경영능력을 검증함으로써 경영권 확보의 길을 터놓는 게 관례였지만 이젠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다는 차원에서 전문경영인 영입을 고려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K옥션 사장엔 이상규 씨

미술품 경매회사 K옥션은 조정열 대표가 갤러리 현대 사장으로 옮겨감에 따라 새 사장에 이상규 전무(51)를 선임했다.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이 사장은 16년간 하나은행에서 근무했고, 10년간 서울옥션과 K옥션에서 경력을 쌓은 경매 전문가. 그는 “K옥션의 비전과 목표를 승계해 핵심 비즈니스를 더욱 강화하고 경매시장의 확고한 리더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