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스는 기분이 나쁠 때면 방에서 종종 사격 연습을 했다. ‘홈스의 마지막 인사’ 편에는 그가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맞은편 벽에 총알로 ‘V.R.’이라는 글자를 새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빅토리아 여왕(Victoria Regina·1819~1901)의 머리글자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작가 코넌 도일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국가 위상이 절정에 달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와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은 이 시대 영국을 이끈 명재상들이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 글래드스턴은 자유당 소속으로 두 사람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영국 정치 발전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는 양당 의회 정치가 정착되고 각종 선진적 정책들이 경쟁적으로 발의됐다. 디즈레일리가 강력한 보호무역정책을 앞세워 중소상인들을 보호하는 데 나서면 글래드스턴은 해외지향적 정책을 통해 내수와 대외교역의 균형을 맞춰 나가는 식이었다. 두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기억되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수주의자 vs 자유주의자

디즈레일리는 런던의 넉넉지 않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문예비평가의 아들로 남다른 감수성과 문장력을 갖췄다. 라틴어나 희랍어 학습능력은 뒤처졌지만 글솜씨만은 좋았다. 다른 학생들이 그의 시를 베껴 가족들에게 보여줄 정도였다. 말도 조리있게 잘 하는 편이었다. 그는 어느새 학생들 사이에 리더로 떠올랐고 교내 연극 등을 주도하게 됐다. 하지만 유대인을 싫어하는 학생들과의 마찰이 큰 싸움으로 번지면서 그는 결국 퇴교 조치를 당했다. 이런 기억 탓에 최초의 유대인 출신 영국 총리가 됐음에도 평생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학교를 그만둔 뒤의 생활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17세 때 아버지의 소개로 변호사 사무실에 견습을 나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 주식 투자와 신문 간행 사업에도 손을 댔지만 모두 실패했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는 결국 자신의 장기를 살려 글 쓰는 일에 매달렸다. 사회생활의 좌절과 경험을 녹여낸 ‘비비언 그레이’가 첫 소설이었다. 이것이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이 소설의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1837년 33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에 선출됐다. 그는 그 후에도 ‘시빌’ ‘코닝즈비’ 등의 소설을 집필하며 평생 펜을 놓지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파란만장한 소년기를 보낸 디즈레일리와 달리 처음부터 정치인으로서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교육은 뭐든지 시킬 수 있는 스코틀랜드계 상인으로 글래드스턴은 ‘부유한 중산층의 기대주’라는 평을 듣고 자랐다. 명문 이튼 학교에 입학한 글래드스턴은 강직하고 농담을 싫어하는 성품이었다. 상급생이 교사의 개인적 결점을 문제삼아 몰아내자고 했을 때 “스승을 배척하는 활동에는 가담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한 일화도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진학한 그는 고전과 수학 두 과목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영국 성공회 성직자가 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정치에 대한 매력을 떨치지 못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1832년 고작 23세에 불과하던 글래드스턴은 보수당 후보로 출마해 뉴어크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훗날의 자유주의자 면모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극단적 보수주의자였다. 노예해방과 민주적 정치개혁을 강력히 반대했던 것.

○사사건건 부딪친 정적

두 사람은 디즈레일리가 보수당에 입당하기 전인 1834년 보수당 출신의 대법관인 존 싱글턴 코플리(린드허스트 경)와의 만찬에서 처음 만났다. 디즈레일리는 어린 나이에도 중후한 인상을 풍겼던 글래드스턴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후로 족히 30년이나 대립할 줄은 몰랐지만….

1837년 디즈레일리가 하원의원이 된 뒤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당시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원로 정치인 로버트 필을 후견인으로 두고 있던 ‘정치 선배’였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아직 겉멋이 든 비주류 새내기 정치인에 불과했다. 디즈레일리는 필과 친분을 쌓아 당내에서 입지를 확보하려 했지만 1841년 필 보수당 내각 출범 때 요직에 기용되지 않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존재감을 갖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디즈레일리와 필의 후계자 격인 글래드스턴은 1846년 곡물법 발의를 둘러싸고 처음으로 맞붙었다. 곡물법은 정부가 영국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 곡물 수입을 제한하는 법이었다.

실용적 보수주의자로서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필과 글래드스턴이 곡물법 폐지를 외치자 디즈레일리는 이에 반기를 들어 보호무역주의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곡물법 논쟁은 보수당이 필파(자유무역파)와 보호주의파로 갈라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필파는 휘그파와 연합해 자유당을 구성했다.

런던타임스가 ‘1 대 1 전투’라고 묘사한 본격적인 싸움은 디즈레일리가 재무부 장관이 된 1852년 12월3일 벌어졌다. 자유무역 확대에 대비해 영국의 3개 주요 산업인 농업 조선 설탕 부문의 세금을 낮추겠다는 디즈레일리의 예산안 발표에 필파는 즉각 반발했다.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은 인신공격까지 불사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는 하원의원의 언행을 구별해 줄 분별과 절제, 인내의 한계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고 헐뜯었다. 두 사람은 이를 기점으로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의 지도자로서 라이벌 구도를 굳혀 나갔다.

디즈레일리가 두 번, 글래드스턴이 네 번 영국 총리를 역임하는 동안 보수당과 자유당은 번갈아 정권을 차지하며 근대 영국의 기틀을 세웠다.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은 아일랜드 국교회를 폐지하고 토지법과 교육법, 노동조합법 등을 통과시켜 아일랜드 자치를 위해 노력했다. 의무 교육제를 실시하고 비밀 투표법도 제정했다.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역시 공중 보건법을 제정하고 주당 근로시간을 줄였다.

글래드스턴과 디즈레일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영국의 대외 팽창은 가속화됐다. 두 사람은 영국이 더 강대해져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디즈레일리는 재임 기간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매수해 중동 진출로를 확보하는 등 제국주의적 확장을 서슴치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제국주의에는 반대했지만 영국이 식민지를 가지는 것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국가를 끌어올린 생산적 경쟁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은 각각 소속당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상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정반대였다. 디즈레일리는 진취적이고 재기 넘친다는 평을 들었던 반면 글래드스턴은 완고한 기독교도의 성향에 장황하게 설명하기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정적을 넘어 누구도 못 말릴 앙숙으로도 유명했다. 디즈레일리가 불행과 재난을 구별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글래드스턴이 강에 빠지면 불행이지만 누가 그를 건져 준다면 재난”이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글래드스턴의 지지자 한 명이 그를 ‘멋진 친구(Grand Old Man)’라는 뜻의 ‘GOM’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자 디즈레일리는 “GOM은 신의 유일한 실수(God’s Only Mistake)”라며 빈정거린 적도 있다.

두 사람은 1881년 4월 디즈레일리가 지병인 통풍과 천식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설을 주고받았다. 디즈레일리의 송덕문을 낭독한 글래드스턴은 “(송덕문 낭독이) 이렇게 힘들기는 처음”이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자주 맞선 상대로서 서로를 잘 알았다.

1881년 디즈레일리가 죽자 여왕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꽃’이라는 메모와 함께 앵초 화환을 보냈지만 글래드스턴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디즈레일리는 호화로운 백합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디즈레일리는 죽기 전에 화가 존 밀레이 경의 아틀리에를 방문했을 때 글래드스턴을 그린 스케치를 물끄러미 보다가 “글래드스턴을 결코 미워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의회에서 끊임없이 대립했던 두 사람이지만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거시적 안목과 생산적인 경쟁이 있었기에 영국은 19세기 세계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