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용평가회사인 피치가 22일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두 단계 떨어뜨렸다. 국가 부채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재정 건전화에 대한 의지가 미흡하다는 판단이다. 정치권 충돌로 좌초위기에 몰린 소비세 인상안이 ‘의지 박약’으로 몰린 가장 큰 이유다. 당분간 국가 부채 비율이 개선될 가능성도 낮다. 올해 예산도 적자로 짜여졌다. 세수에 비해 세출이 훨씬 큰 구조다. 특단의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일본의 부채 규모는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피치가 신용등급을 강등하면서 ‘부정적’ 전망을 함께 내놓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적자 투성이 재정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국채와 차입금, 정부 단기증권 등을 모두 합친 일본의 전체 국가 부채 잔액은 959조9503억엔이다. 원화로는 1경원이 넘는 규모로 사상 최대치다. 국가 부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국채로 789조3420억엔에 달했다. 전체 부채의 82% 수준이다. 1년 전인 작년 3월 말에 비해서는 국채 발행잔액이 30조엔가량 증가했다. 나머지는 차입금(53조7410억엔)과 정부 단기증권(116조8673억엔) 등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00%를 넘어섰다. 유럽의 재정위기 국가인 그리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국가 부채 비율이 낮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우선 돈 들어갈 데가 많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복구를 위한 자금을 마련해야 하고, 연금적자를 메우기 위한 채권도 찍어야 한다. 엔화가치가 지나치게 상승할 경우엔 시장개입을 위한 돈도 준비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재해 복구를 위한 부흥채권을 포함해 올해 중 44조엔 이상의 신규 국채를 발행할 예정이다. 그만큼 빚은 늘어나게 된다. 반면 세수를 늘릴 방안은 마땅치 않다. 일본 집권 민주당이 소비세 인상안을 추진 중이지만 여권 내에서조차 반대 목소리가 높다.

◆급박한 위기 가능성은 낮아

일본의 재정난이 심각하지만 당장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가계의 금융자산이 국가채무보다 훨씬 많아 재정악화에도 불구하고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릴 우려는 적다.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일본은 국내에서 국채가 95% 정도 소화되고 있는 것도 재정위기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시장도 큰 충격을 받지는 않는 모습이다. 이미 예상된 악재라는 반응이 우세했다. 외환시장에서는 엔화 매도세가 늘어났다. 그러나 거래 규모는 크지 않았다.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 소식이 발표된 직후 엔화 환율은 달러당 79.5엔에서 79.9엔으로 0.4엔 올랐다. 이날 저녁 오사카 증권거래소에서 이뤄진 닛케이 평균 선물 6월물 가격도 종가 대비 10엔가량 하락하는 데 그쳤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신용등급 하락 소식이 시장에 큰 재료로 작용하지는 않을 전망”이라고 전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