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패션 디자이너나 사진 작가로 성공하는거요? 인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뉴욕에는 기회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곳의 예술·패션계는 정말 작은 커뮤니티죠. 실력은 있는데 커넥션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세계 최고 수준의 매체에 발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뉴욕 패션계는 한 신생 잡지의 출현으로 들썩였다. 10년 넘게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프랑스의 전설적 디자이너 아제딘 알라이아가 이름도 생소한 잡지와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라이아는 인터뷰에서 ‘패션계의 권력자’ 안나 윈투어 보그 편집장(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모델)을 “그녀가 입은 옷을 보면 얼마나 감각이 형편없는지 알 수 있다”며 비판해 패션계를 경악케했다.

온라인 뉴스사이트 허핑턴포스트가 이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는 등 패션계의 이목이 집중되자 미국 최대 서점체인 반스앤드노블이 “잡지를 넣어달라”며 먼저 연락을 해왔다. 덕분에 이 잡지는 1만부 이상 팔렸다. 반스앤드노블이 먼저 입고를 요청하는 일은 이례적이다.

‘더 그라운드(The Ground)’라는 이름의 이 잡지를 만든 주인공들은 젊은 한국인들. 사진 작가인 라이언 윤(36·한국명 윤용석) 아티스틱큐브 대표와 부동산 펀드매니저 데니스 반(34·반주현), 사진 작가 잭 김(31·한국명 김종민)이 그들이다.

윤 대표는 “뉴욕의 명문 패션학교 FIT를 졸업하고도 인맥이 없어 사람들에게 제 작품을 보여주지도 못했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뉴욕대에서 금융학을 전공한 반 파트너와 의기투합해 ‘예술·패션계의 페이스북’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한 것. 알라이아 같은 패션계의 거물들이 신생 잡지의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한 것도 이 같은 사업 취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달 초 2호 잡지 출판과 함께 ‘더 그라운드 소셜’이라는 소셜네트워크사이트(SNS)를 론칭했다. 미래의 유명 디자이너나 작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올리고, 인맥을 쌓고,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사이트는 등급제로 운영된다. 가입과 함께 ‘멤버’ 자격이 주어지고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 ‘주니어 웹 컨트리뷰터’ ‘웹 컨트리뷰터’ 등으로 등급이 올라간다. 그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놓는 작가는 분기마다 출간되는 잡지 ‘더 그라운드’에 인터뷰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다. 알라이아와 같은 거물들과 나란히 잡지에 실릴 수 있으니 젊은 신인들에게는 '꿈의 미디어'가 되는 셈이다.

윤 대표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을 섭외해 잡지를 먼저 출간한 건 아마추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2호 잡지에도 세계적 사진 작가 로버트 폴리도리, 일본의 천재 건축가 안도 다다오, 최근 뉴욕타임스가 극찬한 한국계 패션 디자이너 시키 임 등 예술·패션계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거물들이 줄줄이 인터뷰에 응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친조카이기도 한 반 파트너는 “현재 투자자를 유치하고 있다”며 “우리가 패션계의 마크 저커버그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며 웃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