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여름, 방콕에 들렀을 때다. 삼성전자 태국법인의 K 과장은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고생이 심했는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며 ‘성공 스토리’를 들려줬다. 그는 태국 전역의 주요 가전제품 매장을 찾아다니며 담당자들을 설득해 Samsung 로고의 제품을 SONY, Sharp, Sanyo 등 ‘S’돌림의 일본 브랜드 옆에 배치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매출이 슬금슬금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태국인들에게 ‘삼성’이란 브랜드는 낯설었지만, 비슷한 발음의 일본 브랜드들 틈에 섞어놓아 ‘착각’을 유도한 게 주효했다. 씁쓸한 성공담이었다.

당시 ‘삼성’은 일본 B급 브랜드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저급상품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특파원으로 부임한 뉴욕 일대의 가전제품 매장에서도 상황은 여전했다. 매장 한복판을 점령한 일본 브랜드에 밀려 맨 뒤쪽의 ‘정리 판매(clearance sale)’ 코너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자존심은 사치였던 '그시절'

“일본이 너무 앞서 있었다. 우리 세대에는 절대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너무도 컸다.” 1969년 삼성전자 설립과 함께 일본의 산요전기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던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회고다.

반도체사업 도전을 시작한 1980년대 초 삼성의 ‘굴욕’은 그보다 훨씬 더했다. 삼성은 당시 라디오용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술도 없었다. 세계 반도체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일본 기업들에 기술제휴를 타진했다. 도시바 히타치 NEC 등 선두기업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문을 조금 열어준 곳이 샤프였다. 산업연수생을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D램 생산라인 현장근로자들의 ‘시다바리(조수)’로 일을 거들 직원들을 보내겠다면 받아줄 수 있다는 게 전부였다.

삼성은 일류 공과대학을 졸업한 젊은 엘리트들을 선발했다. 이들이 샤프 생산라인의 ‘시다바리’로 보낸 나날은 굴욕의 연속이었다. 매일 새벽 출근해 공장 바닥과 생산기계를 깨끗이 청소하고, 작업시간이 시작되면 직원들이 시키는 조수 역할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며, 어떤 질문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일본 생산직원들은 고졸 기능공들이었다. 그들의 작업을 삼성의 엘리트들은 그저 어깨너머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공정처리 과정을 틈틈이 메모지에 적다가 들켜 ‘스파이질을 한다’며 곤경에 빠진 날이 부지기수였다.

굴욕을 먹고 일어선 삼성

샤프 산업연수단은 매일 밤늦게 퇴근해 어렵게 메모한 내용을 서로 맞춰가며 어렴풋이나마 ‘D램 제조기술 노트’를 완성했다. 힘겨운 연수를 끝낸 사원들에게 삼성 본사는 “귀국 비행기를 절대로 함께 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만에 하나 항공사고가 날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연수생들은 일정을 끝내고 힘겨웠던 시절을 서로 위로할 틈도 없이 제각각 짐을 꾸려야 했다. 절박하고 비장했던 당시 삼성의 결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오늘의 ‘글로벌 넘버 원’ 삼성은 그런 고통과 피와 땀이 어우러진 ‘사투(死鬪)’의 결실이다. 삼성을 주눅들게 하고 좌절하게 했던 일본 기업들은 하나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산요전기는 이미 파산했고, 샤프는 최근 대만 훙하이에 경영권을 넘겼다. 소니 등 일본 전자업체를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의 매출과 이익에 훨씬 못 미친다. 경쟁의 세계는 비정하고,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건 없으며, 영원한 승자도 없다. 오래 전 일들을 되새겨보는 이유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