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빌라·사랑채 아파트…'도시형 한옥시대' 열렸다
서울 가회동 31 일대의 골목길. 완만한 경사를 따라 처마선이 자연스레 이어진 이곳은 ‘북촌5경’으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이 중에서도 문화재 대목 기능장 정영수 대목이 다시 지었다는 ‘심심헌(尋心軒)’은 전통 한옥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수작으로 꼽힌다. 북촌을 찾는 내외국인 관광객에게 내부를 공개하는 유일한 한옥이기도 하다.

옛 한옥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북촌이 값비싼 ‘명품시장’이라면, 최근 한옥 열풍을 타고 등장하기 시작한 ‘도시형한옥(생활한옥)’은 현대인에 맞게 고안된 ‘대중상품’이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할 뿐 아니라 복층형 등 요즘 수요자 입맛에 맞는 다양한 건축 형태를 반영하고 있어서다. 화장실과 난방 등 전통한옥의 단점을 개선한 것도 경쟁력으로 꼽힌다.

◆모듈화·복층화…‘생활한옥 시대’ 활짝

한옥빌라·사랑채 아파트…'도시형 한옥시대' 열렸다
생활한옥과 기존 한옥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가격이다. 생활한옥은 자재를 규격화해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한 ‘표준화(모듈화)’ 방식을 통해 제작비를 크게 낮췄다. 일반 한옥의 건축비가 3.3㎡당 1000만~2000만원을 호가하는 데 비해 650만~700만원 선이면 가능하다. 김승배 피데스개발 사장은 “현대인의 주거문화에 맞도록 개선하면서 고유의 멋을 살린 상품”이라며 “전통 한복과 비교하면 ‘개량 한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단층 형태의 전통 한옥 형태를 변형해 2층이나 다세대형 등으로 건축 기법을 다양화하는 시도도 활발하다. 최근 서울 인사동에 들어선 2층 한옥 ‘관훈재’가 대표적인 사례다. 1층은 전통 공예품 전시 매장, 2층은 전통찻집으로 쓰도록 설계된 상업용 한옥이다. 이 건물을 지은 김장권 북촌HRC 대표는 “한옥에 대한 선호도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좁은 땅에 수익성을 높이려면 복층형 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보급형 생활한옥이 확산되더라도 한옥 고유의 격을 잃을 정도로 싸구려 제품이 양산될 경우 모처럼 재부각된 한옥에 대한 관심이 다시 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단지형 한옥빌라 개발도 봇물

서울시도 은평뉴타운에 조성하는 한옥마을에 2층 한옥을 도입하기로 했다. 122가구를 짓는 단지형 한옥마을인 이곳에는 2층 한옥뿐 아니라 다세대형 한옥도 들어선다. 전용면적 60~200㎡로 다양한 크기의 개량 한옥을 대거 선보일 계획이다. 이경아 서울시 한옥정책연구팀장은 “시대 변화에 맞게 전통한옥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한옥모델을 보급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재개발 사업장인 성북동 225의 103 일대 성북2구역에 아파트와 함께 50채의 한옥이 조성돼 일반 분양될 예정이다. 아파트 일색인 신도시에도 한옥이 들어서는 곳이 등장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시행 중인 동탄2신도시로, 300가구의 한옥이 조성될 예정이다.

단지형 한옥 개발이 잇따르면서 국토해양부는 한옥 보급 활성화 차원에서 주택법을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0가구 이상은 인허가 절차가 까다로운 사업승인 대상으로 묶여 있어 대규모 한옥 개발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토부 건축문화경관팀 관계자는 “한옥의 사업 승인 기준을 50가구나 100가구로 늘려 청약통장 없이 사업자가 임의분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조경이나 도로 설치 기준도 한옥의 특성에 맞게 일부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한옥빌라·사랑채 아파트…'도시형 한옥시대' 열렸다

◆아파트도 ‘전통건축 담아내기’ 열풍

한옥을 토대로 한 ‘전통건축 담아내기’는 아파트에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주택단지 기획 단계부터 전통건축 컨셉트를 표방하고 ‘한국형 주거’를 내세우는 한옥형 아파트 단지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미 국내 아파트 평면의 골격 자체가 한옥의 요소를 담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구식 아파트와 달리 한옥의 마당에 해당하는 거실이 아파트 복판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지난 3월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서울 마포 용강2구역에서 분양한 ‘래미안 용강 리버웰’ 단지에는 한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주민공동시설이 들어선다. 재개발 구역인 이곳은 구한말 지어진 한옥 세 채를 헐지 않고 한 채는 게스트하우스로, 나머지 두 채는 주민사랑방, 공부방, 전통공방 등으로 꾸밀 계획이다.

지난해 10월 피데스개발과 우미건설이 전남 목포 옥암동에 공급한 ‘우미파렌하이트’도 한옥을 응용한 평면으로 관심을 끌었다. 전용면적 127㎡형과 140㎡형 일부 가구 내에 한옥의 사랑채를 들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우미건설 관계자는 “인근에 소쇄원 등 유명한 전통한옥이 많아 주민들이 한옥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점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LH도 한옥 평면 개발에 나서고 있다. 사랑방형·한실형·안마당형·다실형 등 ‘한국형 LH 주택’으로 명명한 4개 타입 개발을 완료해 연말에 공급하는 하남 감일지구 보금자리주택에 처음 적용할 계획이다. 주재영 LH 주택디자인팀 차장은 “복고 트렌드 등을 내다보고 한옥의 장점을 아파트에 접목하는 작업을 2008년부터 시작했다”며 “평면 개발이 알려진 이후 기존 분양자들도 이를 적용해달라는 문의가 올 정도로 반응이 좋은 편”이라고 전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