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경제전문잡지 포브스는 ‘2012년 대만 최고 부자’ 순위를 발표했다. 1위는 의외의 인물이 차지했다. 쌀과자와 사탕을 생산하는 식품기업 왕왕(旺旺)그룹의 차이옌밍(蔡衍明) 회장(55)이 주인공. 그의 별명은 ‘쌀과자 대왕’이다. 작년 1위였던 왕쉐홍 HTC 회장과 궈타이밍 팍스콘 회장 등 쟁쟁한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의 오너들을 모두 제쳤다. 차이 회장의 재산은 지난해 61억달러에서 올해 80억달러로 늘었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66억달러)보다 많다.

차이 회장은 19살 때 파산 직전까지 갔던 가업을 물려받아 회사를 세계 최대의 쌀과자 업체로 키웠다. ‘왕왕 쌀과자’의 대만과 중국 쌀과자시장 점유율은 각각 95%와 80%에 달한다. 왕왕의 작년 매출은 29억달러. 창사 후 매년 평균 30%씩 증가하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 왕왕그룹의 쌀과자와 QQ캔디, 과자인 소만두 등은 점유율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무모하지만 끈질기게

부유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차이 회장은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공부를 싫어했다. 책읽는 것이라면 질색이었다. 차이 회장은 지금도 “책을 읽느니 사람들하고 놀겠다”고 말한다.

그는 19살 때인 1982년 아버지가 세운 통조림 수출업체 ‘이란식품’에 취직했다. 차이 회장의 부친은 그에게 경리업무를 맡겼지만, 그는 장부를 읽을 줄도 몰랐다. 인력 관리도 미숙했다. 장부 관리를 못해 금고에 돈이 남아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차이 회장은 “하지만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회고했다.

차이옌밍은 당시 이란식품이 하던 통조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제품 대부분이 외상으로 팔려 1년 만에 1억위안의 빚을 지게 된 것. 그는 통조림 사업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른 사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쌀과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서 쌀과자가 잘 팔리는 것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중국 대만 등 중화권에서 쌀과자는 생소한 음식이었다. 쌀과자를 만들 기술이 없었다. 그는 당시 대만에 진출해 있던 일본 유명 쌀과자업체 이와쓰카의 회장에게 매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기술을 전수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결국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83년 이와쓰카의 도움을 받아 ‘왕왕센베’를 내놓았다.

차이 회장은 성격이 느긋한 편이다. 그러나 목표를 정하면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끝까지 달려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왕왕센베는 대만에서 인기를 끌었다. 7년 뒤인 1990년 시장점유율이 90% 가까이 치솟았다.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에 진출하기로 한 것. 1992년 차이옌밍은 다른 대만 기업인들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중국 연안도시로 갔지만 그는 내륙인 후난성 창사지방에 공장을 지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돈이 없었다. 왕왕이 투자할 돈은 1000만위안 정도에 불과했다. 이 돈으로는 연안도시에서 원하는 만큼의 땅을 살 수 없었다. 또 개발이 안 된 지역에서 사업을 하면 중국 정부가 지원을 해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왕왕그룹은 후난성 최초의 대만 투자기업이 됐다. 후난성 정부는 왕왕그룹에 상당한 특혜를 준 것으로 알려졌다.

후난성이 주요 쌀 산지라는 것도 이 지역을 선택한 배경이 됐다. 쌀값이 싸고 품질이 좋았기 때문에 쌀과자 생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왕왕그룹은 10년 만에 중국시장 점유율을 약 70%까지 끌어올렸다. 왕왕은 지금도 중국 본토에 연평균 약 5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경쟁업체의 도전도 있었다. 이는 무모하리 만큼 파격적인 가격 인하로 막아냈다. 왕왕센베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자 1990년대 후반 200여개가 넘는 왕왕 쌀과자 유사품이 등장했다. 출혈경쟁이 벌어지자 80%에 달하던 왕왕센베의 점유율은 3년 만에 50%로 추락했다.

차이 회장은 브랜드와 가격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왕왕이란 브랜드 외에 헤이피(黑皮) 등 4종의 다른 브랜드 제품을 내놓았다. 이 제품의 가격은 기존 제품에 비해 40%가량 낮게 책정했다. 서브 브랜드 전략은 적중했다. 다른 경쟁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왕왕그룹은 3년 만에 과거 시장점유율을 회복했다. 대만 중국시보는 “대만업체들이 중국 본토 기업과 경쟁할 때 왕왕그룹의 가격 전략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브랜드로

중화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브랜드로 사용한 것도 성공비결로 꼽힌다. ‘왕왕’이라는 단어는 좋은 어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뜻도 좋다. 중국어로 ‘왕왕’은 무슨 일이든지 왕성하게 잘된다는 의미다.

차이 회장은 처음 중국 사업을 시작할 때 물건이 팔리지 않아 고생했다. 판매상이 중간에 사라져 많은 제품을 폐기처분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공장 직원들은 제품을 대만으로 가져다 팔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차이 회장은 운송비가 더 든다며 내륙 판매를 강행했다. 제품 유통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이디어를 냈다. 상하이, 난징, 창사, 광저우에 있는 친구들에게 과자를 공짜로 나눠 준 것. 쌀과자를 받은 친구들은 이를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차이 회장의 친구들에게 제품을 어디서 살 수 있냐는 문의를 해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왕왕’이라는 단어는 중국 본토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줬다. 판매가 늘기 시작했다. 차이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광고를 내보냈다. 광고 카피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 왕성해지길!’이었다. 광고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판매 확대로 이어졌다.

유통망 구축 전략도 성공의 배경이 됐다. 차이 회장은 ‘유통망 경작’이라는 전략을 세웠다. 농촌부터 도시까지 촘촘한 유통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또 무조건 현금결제를 원칙으로 했고,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의 반품을 조건없이 모두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신용을 쌓았다.

◆“전문경영인을 활용하라”

왕왕그룹의 사업분야는 과자, 유제품, 음료, 케이크까지 다양하다. 식품업뿐 아니라 병원, 레스토랑 체인, 호텔, 보험사를 갖고 있다. 2009년 차이 회장은 네덜란드은행 ABN암로가 보유하고 있던 아시아TV 지분을 개인 명의로 매입했다. 아시아TV는 1957년 설립된 홍콩의 대표적인 텔레비전 방송국이다. 차이 회장은 2008년 대만의 유력 일간지 중국시보도 인수했다. 최근에는 주류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차이 회장이 무모하리 만큼 사업을 확장하는 이유는 수익성이 있다면 한 분야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떤 사업분야건 투자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하지만 식품업 외에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긴다. 차이 회장은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는 내가 하면 되고, 다른 분야에는 전문가들의 힘을 빌리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식품업에 대해서는 “식품업은 경기가 좋을 때 가장 먼저 성장하고, 경기가 하락할 때 가장 먼저 나빠지기 때문에 타이밍이 중요한 사업”이라고 말한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