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重 출신 '황야의 7인'과 창업…20년만에 '기계강국' 독일 턱밑 추격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온 1994년 6월 초.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서 근무하던 전병찬 대우중공업 차장에게 날벼락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독립해서 중고 건설장비 판매사업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청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매출채권을 관리하던 그는 중고 장비의 원활한 판매 방안을 찾기 위해 일본 고마쓰 등을 둘러본 뒤 회사에 보고서를 냈다. 골자는 ‘일본은 한국과 달리 중고 장비를 별도 업체가 팔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보고를 받은 담당 임원은 “그러면 자네들이 나가서 해보게”라는 엉뚱한 제안을 했다. 당시만 해도 대우중공업은 잘 나가던 회사였고 전 차장 역시 13년간 일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터였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오기가 발동했다. 못할 게 뭐 있을까.

당시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여직원 포함, 7명의 동료가 졸지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직했다. 황무지로 나선 것이다. 이들은 퇴직금 2억원을 모아 서울 구로동에 간판을 걸었다. 한우건설기계였다. 에버다임의 전신이다. 이때가 7월 초.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은 셈이다. 전병찬 사장(57)은 “회사의 명령이 있으니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창업했다”고 당시 심정을 밝혔다.

사업은 쉽지 않았다. 창업 첫해 종잣돈 2억원 중 거의 절반인 9700만원을 까먹었다. 굴삭기 로더 크레인 등 중고 장비는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자 국내 중고 장비 시장이 아예 가라앉았다. 대우중공업에서 매입한 중고 건설장비가 1000여대, 무려 200여억원어치에 달했다. 채권은행에서는 대우를 대신해 돈을 갚으라고 매일 닦달했다.

방법은 수출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장비를 어디에 어떻게 팔아야 할지 몰랐다. 에버다임은 6개 팀의 특공대를 조직해 해외로 내보냈다. 이들의 얼굴엔 비장함이 감돌았다. 활로를 찾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중압감 탓이었다. 중국 중동 남미 등 곳곳으로 흩어진 이들은 허름한 숙소에 머무르며 해가 뜨기 무섭게 바이어를 찾아 나섰다. 밤 늦게 파김치가 돼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다.

얼마 뒤 남미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요가 늘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당시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급등(원화가치 급락)하면서 이 지역 수출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2년 만에 100억원에 이르는 빚을 갚았다.

그러던 어느날 전 사장은 자존심 상하는 얘기를 들었다. 주말에 종업원 가족들이 회사에 놀러와 부침개를 부쳐 먹고 노는데 한 어린아이가 “왜 아빠 회사에서는 썩은 차만 팔아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때부터 건설장비 제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도난 회사가 급증했고, 우수 인재들이 거리를 헤맬 때였다. 이들을 모아 연구·개발에 투입했다. 첫 제품은 브레이커였다. 굴삭기 끝에 달아 철거 건물 등을 부수는 장비였다. 그 뒤 크레인, 록드릴(Rock Drill), 인명구조용 소방차 등을 속속 개발했다. 이들은 다품종 소량 생산 품목이어서 대기업들이 손대기 힘든 분야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기술력을 필요로 했다. 일부 제품의 경우 외국 유명 업체와 기술 제휴로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업을 확장하면서 대기업 하청 생산은 하지 않고 자체 브랜드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다짐했다. 해외에 대리점을 순차적으로 개설해 지금은 80개국에 145개의 딜러망을 구축했다. 급성장하는 중국과 중동, 자원 강국인 몽골시장 공략을 위해 이들 3곳에 현지 법인도 설립했다.

수출지역에는 기계 강국인 독일과 일본도 들어 있다. 전 사장은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규제가 많아 대형 콘크리트 펌프카를 생산하지 못해 이 틈새를 뚫었다”고 설명했다. 유럽의 경우 대표적인 기계전시회 등에 꾸준히 출품하면서 바이어들에게 신뢰를 얻어 건설장비용 펌프카와 어태치먼트 장비(굴삭기 끝에 붙여 쓰는 장비)를 수출하고 있다.

전 사장은 “우리는 독일 제품을 국산화해 이들 제품보다 조금 싸게 파는 전략을 썼다”고 말했다. 독일 기계는 가격이 무척 비싸 이들보다 약간 싸게 팔아도 이윤이 괜찮았다. 이들과 경쟁한다는 생각으로 제품을 개발하다 보니 품질 수준도 올라갔다.

이 회사는 4단계 다각화 전략을 쓰고 있다. 첫 단계가 브레이커 펌프카 타워크레인 등 건설장비다. 두 번째는 록드릴 등 토목장비다. 세 번째 단계는 인명구조용 소방차다. 현재 20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제품을 생산 중이고 28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하고 있다.

네 번째는 자원개발용 장비다. 전 사장은 “지하 1000~2000m까지 파들어가 암석을 꺼낼 수 있는 드릴리그(Drill Rig)를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이때 꺼낸 원통형 암석을 분석하면 지하에 있는 자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연관된 제품이다. 유압기술을 이용한 장비다. “단계별로 시장 규모가 더욱 커지는 특징이 있다”고 전 사장은 덧붙였다. 신제품 개발을 위해 진천과 서울 가산동 두 곳에 연구개발센터를 두고 60여명을 투입하고 있다. 전체 직원 350여명중 17% 정도가 연구인력이다. 석·박사급 연구원도 있다. 그는 “사업 다각화를 통해 에버다임을 더욱 경쟁력 있는 수출업체로 키워 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의 꿈은 단순히 각종 건설장비 등을 개발·생산하는 게 아니다. 공장 벽에 붙어 있는 슬로건처럼 ‘미래를 건설(Build the Future)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대우重 출신 '황야의 7인'과 창업…20년만에 '기계강국' 독일 턱밑 추격

2대가 함께 다니는 회사…부자·부녀 사원 30명

장도용 에버다임 정비서비스팀장(49)과 장유리 드릴구매자재팀 사원(23)은 부녀지간이다. 아침마다 함께 출근한다. 이 회사에는 이들처럼 부녀, 부자, 형제 사원이 15가족(30명)이나 된다. 이 회사의 표어는 ‘2대가 함께 다니는 회사를 만들자’다.

구호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전병찬 사장은 생산직과 사무직 구분을 없앴다. 이들 모두에게 연봉제를 적용한다. 구내식당도 똑같이 이용한다.

이는 전 사장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청주대에 진학하기 전 청주공고 기계과를 다니다 구로공단 내 봉제인형 업체에 취직해 2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허리춤에 드라이버, 스패너를 차고 보일러를 고치고 미싱을 수리했다. 5분 대기조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출동했다. 기능올림픽 출전을 준비할 정도로 이 분야에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점차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한 생산직은 사무직과 유니폼이 달랐다. 식당도 구분돼 있었다. 인형공장을 그만두고 청주대 행정학과에 진학한 배경이다.

전 사장은 작년 말과 올해 초 직원들에게 1인당 평균 2000주씩 주식을 무상으로 나눠줬다. 이때도 직종 간 차별은 없었다. 단지 근속연수와 공헌도를 감안했을 뿐이다. 그는 경영 내용을 전 직원에게 공개하고 실적에 따라 특별성과급과 포상금을 주며 직원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는 회사를 만들고 있다. 이를 통해 아빠와 딸이 함께 다녀도 부끄럽지 않은 회사로 키울 계획이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