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고 출근 "상무님, 오늘 스타일 끝내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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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을 최대한 편하게, 연체동물처럼 뼈가 없다고 생각하고 흐느적 흐느적거리며 주문처럼 뱉는 말.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별말씀을.”

지난달 말 개봉한 영화 ‘아부의 왕’에서 《감성 영업의 정석》이라는 비법서를 저술한 아부계의 전설 ‘혀고수’(성동일)의 주옥 같은 대사들. “아침에 나올 때 거울을 보고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어둬라. 버리지는 말고.” “뇌를 그냥 툭 놔버려, 그냥.”

차갑게 식어버린 자존심은 언제쯤 꺼내 쓸 수 있을까. 웃음과 과장으로 점철된 생계형 풍자코미디 영화 속에 실제 우리 직장인의 삶이 녹아 있다. 착실과 정직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 우직하게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일개미형은 ‘개념 상실’에 ‘센스 제로’라는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소신은 접어두고 개념 장착형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생존 스킬, 바로 ‘아부의 기술’이다.

◆외모를 칭찬하라

가장 공략하기 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언급은 외모에 대한 것이다. “앗, 헤어스타일 바꾸셨네요? 훨씬 낫다. 젊어보여요.” “어머, 타이 색깔이 요새 유행하는 녹색이네요. 역시 트렌드를 앞서가신다.” 식상한 듯 보이지만 이미 상사는 웃고 있다.

알면서도 속고, 자꾸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알기에 김 대리는 본인의 사수인 이 과장이 출근하면 인사를 하는 동시에 이 과장의 화장, 고데기 스타일, 귀걸이, 옷, 가방, 구두까지 쭉 스캔한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 혹은 “어?”라는 감탄사부터 내뱉고 본다. “아! 과장님 오늘 팔찌로 포인트 주셨네요? 그거 제가 사고 싶었던 스타일인데”라는 기본적인 멘트와 더불어 “어디서 사셨어요? 어제 입으셨던 원피스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라는 추가 질문과 코멘트로 진정성을 확보한다.

◆아부는 노래를 타고…

평소 노래 좀 한다는 이 과장에게 최적의 장소는 노래방이다. 그에겐 남다른 애창곡 목록이 있으니, ‘용비어천가’로 전환이 쉬운 노래들이다. 그가 가장 즐겨부르는 노래는 이적의 ‘다행이다’. “부장님 만나서 다행이다~ 이렇게 좋은 상사 있어줘서~.” 아부로 발라드를 부르는 것이 참신하면서 라임까지 잘 맞아 반응이 좋다.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자리에서는 박상철의 ‘무조건’이 최고다. “부장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랑이야~ 태평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부장님 부르면 달려갈거야~ 무조건 달려갈거야~.” 만약 자리를 정리하는 라스트 송을 부를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진다면? 두말할 것 없이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선택한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김 부장님,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가족을 공략하라

체육대회나 워크숍, MT 등 회사행사에 가족이 동반하는 경우 역시 상사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때는 상사의 배우자나 아이들을 칭찬하는 것이 포인트다. 섬유회사에 다니는 최 차장은 이 방면에서 고수다. “‘언니가 너무 젊어보인다’거나 미인이라는 말도 좋아하긴 하지만 아이들을 칭찬하면 더 기분이 좋아지죠. ‘아빠를 닮았나봐요. 큰 딸이 정말 똘똘하네요.’ ‘어쩜, 어린 애가 이목구비가 이렇게 뚜렷하네. 아역 배우 시켜도 되겠어요.’ 이런 얘기들이죠. 가족이 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상사도 그 이미지를 공유하게 되니까요.”

의류업체 인사팀 장 과장은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 그의 아부는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이뤄진다. 인사팀에서 근무해 직원들의 대소사를 훤히 꿰고 있는 그는 다이어리에 상사의 대소사를 모두 기록해놓는다. 생일 땐 축하 문자와 함께 작은 선물을 챙기고, 아들 졸업식에도 꽃다발을 보냈을 정도다. 자녀 결혼을 미리 알면 회사 공고가 뜨기 전에 축의금을 준비해 책상 위에 올려둔다. 그의 직장 생활 철학. “개에게는 밥주는 사람이 주인이죠. 저에게는 상사의 대소사가 밥줄입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하라

상사의 음식 취향도 잘 파악해둬야 한다.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박 부장은 매일 아침 회사 1층 커피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산다. 부서를 옮긴 지 1주일째, 박 부장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듬뿍 넣고 너무 진해 생수를 섞어 마시는 취향을 파악한 신 대리. 다음날 일찍 출근하면서 ‘오늘은 커피 사지 마세요^^’라는 깜찍한 문자를 날린다. 책상 위 자신의 취향을 완벽히 반영한 아메리카노의 상태를 본 박 부장은 ‘깜놀’ 모드. 신 대리는 겸손하게 마무리 멘트를 날린다. “매일 얻어만 먹어서 오늘은 제가 쏘는 거예요.” 상큼한 하루가 시작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송 대리는 최근 평소 다니던 집근처 교회를 과감히 떠났다. 그리고는 버스와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먼 지역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피 같은 일요일, 왕복 2시간 이상을 길에서 허비해야 하는 것을 감수한 까닭은 직속 상사인 최 부장이 다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 “앗, 부장님~ 여기 다니세요? 저도 얼마 전부터 다니는데 잘됐네요. 교회에서 뵈니 더 반갑네요. 역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의 직장생활은 한동안 별 걱정이 없어 보인다.

◆아부의 반전

[金과장 & 李대리]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고 출근 "상무님, 오늘 스타일 끝내주네요"
패션업체에 다니는 김 대리는 최근 히스테리로 악명이 높은 노처녀 이 차장이 있는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초반부터 아부 전략을 펴기로 결심한 김 대리. 발령을 받은 후 첫 인사부터 외모에 대한 아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차장님 나이대에 이만한 미인은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특히 콧대가 정말 높고 예쁘세요. 남들이 보면 코 수술한 줄 알겠어요.” 하지만 그 순간 이 차장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알고보니 코뿐 아니라 눈도 수술했더라고요. 괜히 눈치 없이 굴었다 역효과만 났어요. 정말 수술이 티 안 나게 잘 됐던데….”

홍보대행사 직원 박모씨는 최근 원하는 회사로 이직했다. 매일 밤 늦게까지 일하던 그는 자기소개서는 물론 면접 준비까지 충실히 할 수 있었다. 그 원동력의 이면에도 아부가 있었다. 밤 늦게까지 뭔가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그에게 선배들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으면 그는 늘 “지난번 선배가 작성했던 PR자료들을 베껴써보고 있습니다. 이걸 모범삼아 하다 보면 실력이 빨리 늘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선배 뒤에서 그는 다른 회사에 낼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었다. 박씨의 아부에 그저 ‘사람 잘 뽑았다’고 만족해 하던 선배들은 요즘 배신감에 마음이 허탈하다고.

윤정현/고경봉/문혜정/강영연/정소람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