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發 디플레 진입] 부채증가 → 집값 하락 → 경기 침체…日 '20년 불황' 초기와 비슷
[가계부채發 디플레 진입] 부채증가 → 집값 하락 → 경기 침체…日 '20년 불황' 초기와 비슷
우리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부채디플레에 빠져들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다. 9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와 부동산 시장 침체라는 이중고가 단시일 내 해소될 조짐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실질 대출금리(명목 대출금리-소비자물가 상승률)가 5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뛰면서 채무자들의 실제적인 채무상환 부담이 늘고 있는 게 문제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얼마전 “우리 경제의 경착륙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실질 금리 상승이 부채디플레라는 폭탄을 터뜨리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경고다.

◆악순환의 메커니즘

부채디플레는 크게 두 가지 경로로 다가온다. 우선 물가 하락에 따른 실질 금리 상승이 대규모 자산 매각으로 이어지는 경우다. 실질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한 채무자들이 자산을 헐값에 매각할 경우 가뜩이나 취약한 부동산 시장을 망가뜨리고 이것이 다시 디플레이션 압력을 키우는 시나리오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순환고리가 이미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2005~2006년 부동산 대세 상승기에 수억원대의 빚을 안고 집을 샀다가 이자 갚기도 벅찬 ‘하우스푸어’로 전락한 사람들은 주변에 널려 있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2006년 수도권 아파트 매매가격은 24%가량 급등했지만 이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급등세가 꺾였고 올 들어서는 오히려 가격이 떨어졌다.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부채 대비 자산이 많아도 소득이 부족한 채무자들이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출 위축 땐 더 위험

또 다른 경제 파급 효과는 소비 위축이다. 실질 채무상환 부담 증가로 가계의 실질 순자산(자산가격-부채)이 감소하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소비는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차지한다. 소비 위축이 심화되면 국내 경기 회복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 불황을 막기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경제가 한번 불황에 빠져들면 단기간에 회복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도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5%에 그친 것은 급격한 소득감소와 소비 심리 악화가 주요인”이라며 “부채디플레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향후 유럽 재정위기 확대로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인 수출이 큰 타격을 받을 경우엔 디플레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일부에선 부채디플레를 걱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나온다. 장재철 씨티그룹 상무는 “최근 물가 하락은 유가 안정과 기저 효과에 따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9일 기자간담회에서 “아직 우리 경제는 부채디플레를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한은은 “아직까지 본격적인 디레버리징(자산매각을 통한 부채 축소)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취약계층 연착륙 유도해야

그럼에도 방심은 금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부채디플레가 현실화되면 하우스푸어 등 취약계층부터 시작해 경제 전체로 충격이 번질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김 연구위원은 “금융권의 위기대응 능력을 키워 대출 회수가 본격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가계부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비은행권이 특히 문제”라고 지적했다. 저축은행과 농협 단위조합 등 사각지대를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 교수는 “부동산 거래세와 보유세를 모두 낮춰 부동산 가격 하락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며 “가계가 소득을 늘려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 대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유미/주용석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