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고란약수와 고란초, 골라내기와 신호발송
찬란했던 백제 역사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충남 부여의 낙화암. 그 뒤편에 고란사라는 고찰(古刹)이 있다. 고란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사찰 근방에 서식하는 고란초라는 희귀식물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란초가 자생하던 암벽 아래에는 고란정이라는 샘터가 있는데 여기서 샘솟는 고란약수는 미네랄이 풍부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약수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고란약수는 ‘어용수(御用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백제의 왕들이 궁녀가 떠다준 고란약수를 매일 마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궁녀들에게도 매일 아침 험한 산길을 올라 약수를 떠오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궁녀들은 간혹 고란약수 대신 근방에서 물을 길러 왕에게 바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물의 맛이 고란약수에 비견될 리 만무하다는 점이다. 또한 고란약수를 매일 마셨을 백제왕이 두 물맛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도 없다. 그래서 백제왕은 궁녀들이 길러다주는 약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를 확인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왕의 체면에 궁녀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고, 그들을 감시하자니 그 또한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왕과 궁녀간의'정보의 비대칭'

고란약수와 관련된 왕과 궁녀 사이의 갈등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정보의 비대칭’ 상황과 닮아있다. 경제학에서 정보의 비대칭을 설명할 때 주로 예로 드는 것이 중고차 매매시장이다. 중고차시장에서 거래되는 차들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까지 그런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정비사나 기술자와 같이 자동차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차의 성능과 상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중고차를 판매하는 사람은 자신이 팔고자 하는 차량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다. 정보의 비대칭이란 이와 같이 거래 당사자 간에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이 차이가 나는 경우를 말한다. 고란약수 이야기의 경우, 왕은 중고차를 사고자하는 구매자의 입장과 같고 궁녀들은 판매자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고란약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정보는 궁녀들만이 알고 있고, 이로 인해 왕과 궁녀들 간에 정보의 비대칭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란약수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백제왕들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제의 왕들은 궁녀들에게 약수 위에 고란초 잎을 띄워오게 하였다고 한다. 고란초는 지금도 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만 당시에도 부여지역, 그 중에서도 고란사 인근에서만 목격되는 희귀식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당시에는 고란정에 가지 않고서는 고란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란초가 물 위에 띄워져 있다는 것은 그 물이 진짜 고란약수임을 말해주는 징표였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백제의 왕들은 자신과 궁녀들 사이에 발생한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기 위해 고란초를 이용했던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고란초와 같이 거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쪽이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취하는 행동을 ‘골라내기(screening)’라고 한다.

고란초를 이용한'골라내기'

그렇다면 중고차시장에서 구매자들이 취할 수 있는 골라내기에는 어떠한 방법들이 있을까? 우선 자동차에 대한 전문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시승을 하는 것만으로도 차량의 성능을 파악할 수 있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구매자라면 구입하려는 차의 품질증명서를 판매자에게 요구할 수 있다. 그동안의 사고기록이나 수리내역 등이 기재되어 있는 품질증명서를 확인함으로써 차량의 상태와 성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자동차를 점검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매매계약 전에 전문가를 대동하여 차량의 상태를 검사해보거나 정비업체를 방문하여 점검을 요청하면 차량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만약 판매자가 이런 요청들을 거부한다면 자동차의 성능이 가격에 비해 좋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소비자는 다른 차를 찾거나 가격을 흥정하여 보다 싼값에 차량을 구매하면 될 것이다.

골라내기는 정보가 없는 거래주체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이와는 반대로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주체가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기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신호발송(signaling)’이라고 한다. 신호발송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는 경제행위 중 하나다. 사람들은 명문 학교에 진학하고 남들이 알아주는 번듯한 회사에 취직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사정담당관이나 인사책임자는 어떤 지원자가 우수한 재목인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심층면접을 통해 지원자의 역량을 가려낼 수도 있지만 수백, 수천에 이르는 모든 지원자를 심층면접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고 시간과 비용 또한 많이 들어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래서 지원서 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면접대상자를 추려내는 방식이 진학과 취업 과정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한다. 즉, 학생들과 사회준비생들이 고득점, 고스펙에 열을 올리는 것은 교육이 가지는 긍정적인 기능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준비된 인재인지를 알리기 위한 신호발송의 일환인 셈이다.

백제왕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고란약수와 고란초, 골라내기와 신호발송
일설에 의하면 고란약수를 즐겨 마셨던 백제의 왕들은 잦은 병치레 없이 건강하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고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백제왕의 건강 이면에는 고란초를 이용하여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한 그들의 현명함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현대인들은 백제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현재에도 정보의 비대칭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히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전에 비해 보편적이고 광범위하게 발생한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따라서 구매자는 양질의 제품이 무엇이고 선량한 판매자가 누구인지 가려내기 위해 골라내기를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판매자 역시 구매자들의 골라내기에 성실히 대응하는 한편, 좋은 제품을 알리기 위해 신호발송을 활발히 펼쳐야 한다. 그래야만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할 수 있고, 시장을 건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백제왕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원식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


경제 용어 풀이

▨ 골라내기 (screening)

정보가 부족한 경제주체가 거래 상대방의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 펼치는 행위다. 다양한 종류의 금융상품이나 보험상품은 고객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일종의 골라내기로 볼 수 있다.

▨ 신호발송 (signaling)

정보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경제주체가 거래 상대방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회사나 제품에 대한 광고가 신호발송의 대표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