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해운대 바다를 영화의 열기로 달구고 있는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지난 5일 밤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가 매해 한국영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을 선정하는 ‘한국 영화 회고전의 밤’이 열렸다. 국내외 스타 배우들과 감독, 제작자, 정부기관 관계자들이 이날의 주인공인 원로배우 신영균 씨(84)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한국 영화 전성기를 대표하는 남성 아이콘이자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에 바치는 헌화였다. 서울대 출신 치과의사이던 그는 1960년 ‘과부’로 데뷔, 1979년 ‘화조’까지 317편의 사극과 멜로·액션영화에서 야성미 넘치는 남성의 매력을 발산했다. 2010년에는 영화박물관과 명보극장 등 사재 500억원을 영화계에 기부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달에는 연극 ‘하얀 중립국’의 주연으로 49년 만에 무대에 올라 연기혼을 불태웠다. “좋은 영화에 다시 출연하고 싶다”는 그를 파라다이스호텔에서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영화제는 세계 영화인들의 주목을 받는 영화제이지만 국내에서도 대다수 영화인들이 참여하는 국민축제예요. 나이를 먹고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기쁘고 행복합니다. 제가 출연한 작품을 보여주고 저를 알지 못했던 관객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감회가 새롭고 배우로서 보람 있는 일입니다.”

▷인연이 각별한 영화가 있을 텐데요.

“이번 회고전에서는 대표작 ‘빨간 마후라’와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을 비롯해 ‘쌀’ ‘십년세도’ ‘무숙자’ ‘대원군’ ‘봄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 8편을 상영하고 있습니다. 300여편의 출연작 모두가 제게는 소중합니다. 다만 1960년대 흥행 기록을 세운 ‘빨간 마후라’와 ‘미워도 다시 한번’,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연산군’ 등 수상작들이 좀더 기억에 남네요.”

▷치과의사를 하다가 배우로 전업했는데요. 만족스런 삶이었는지요.

“연기에 대한 열망이 컸지요. 치과의사를 하던 중에도 연극에 출연했으니까요. 1960년 ‘과부’로 데뷔할 때 망설여지기도 했어요. 실패하면 다시 치과의사를 해야 했으니까요. 다행히 초기작들이 성공하면서 배우가 됐습니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 의사란 배경도 많이 뒷받침해줬습니다. 극중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남자 역을 많이 했습니다. 내 속에 그런 면이 있어서 그런 역할을 원했어요. 제게는 강한 캐릭터가 잘 맞았습니다.”

▷지난달에는 49년 만에 ‘하얀 중립국’이란 연극 무대에 올라 성직자 역할을 했습니다.

“올 들어 서울대 동문들이 연극모임 ‘관악극회’를 창립했어요. 초대 회장인 후배 이순재 씨가 저를 찾아와 창립작 공연에 꼭 출연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연극무대에 오른 게 너무 오래 전이라 망설였어요. 그런데 신문에 제가 출연한다는 기사가 게재된 거예요. 하는 수 없이 용기를 냈지요. 제 연극을 보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올드팬도 있더군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제의가 오면 수락할 용의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배우에게 은퇴란 없습니다. 배역이 없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공백기를 가질 수는 있지만요. 최근 출연을 제안받은 영화도 있어요. 특수부대원 출신의 노인이 성범죄단에 납치당한 손녀딸을 구출하는 이야기였어요. 캐릭터는 마음에 들었는데 구성이 허술해서 거절했지요.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있다면 기꺼이 출연하고 싶습니다. 칸영화제에서 원로배우와 감독들이 수상하는 장면을 보니까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네요.”

▷한국 영화가 1960년대에 이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니까 예전보다 한국 영화 수준이 많이 높아졌더군요. 경쟁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를 주장할 때에도 극장주들은 반대했습니다. 명보극장을 운영해봐서 잘 압니다. 보호받아 제작된 작품들은 흥행에 실패하거든요. 스크린쿼터를 축소한 뒤 한국 영화 경쟁력이 높아졌습니다. 모든 것을 개방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영화산업이 활황이라고 해도 싸이 등 음악인들이 해외에서 이룬 성과에 비해서는 부족합니다.

“싸이가 요즘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더군요. K팝이 일본 등 아시아에서 큰 성과를 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제 영화도 한류를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예술영화가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듯이 한국 영화가 해외시장에서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후배 영화인들이 도전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박물관을 제주도에 세운 이유가 있나요.

“신상옥 감독의 ‘마적’을 찍으러 제주도에 처음 갔습니다. 야자수들이 있는 풍광이 아름답고 이국적이더군요. 그후 서귀포 근처의 땅을 사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언젠가 고향 삼아 그곳에 내려가 호텔을 짓고 가족과 함께 살 요량으로 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갔더니 배우 이시하라 유지로의 기념관이 근사하게 지어져 있더군요. 관광객도 많이 오고요. 선진국들은 박물관을 많이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한국 영화계를 위해서라도 영화박물관을 짓기로 결심했죠. 1999년 박물관을 완공하니 인파가 몰리더군요.”

▷명보극장 등 극장사업에도 손을 댔지요.

“가족이 1950년대 시골에서 극장을 경영했어요. TV가 없던 시절이니까 잘 됐지요. 1960년대 초 배우를 하면서 동업으로 서울 금호동에 극장을 열었어요. 명보극장은 1977년에 인수했지요. 극장 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한 게 계기였어요. 저와 희극인 김희갑 씨가 영화를 공동으로 제작한 뒤 국도극장에서 상영했어요. 로비를 벌여 다른 영화를 밀어내고 들어간 게 화근이었어요. 다른 극장주들이 저희들이 제작한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습니다.”

▷극장 운영을 통해 재산을 불렸는지요.

“제게는 안정적인 생활이 중요했어요. 치과의사를 하다가 영화배우를 하니까 위험성이 커졌어요. 당시 전쟁 신을 촬영할 때에는 실탄을 쐈어요. 말을 타다가 떨어져 제 손가락이 아직도 구부러져 있습니다. 제가 혹시 사고로 죽더라도 가족은 안정적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손댄 극장에 사람들이 몰려왔고, 빵 공장을 인수해 설립한 명보제과도 잘 됐지요. 전성기 때 제 출연료는 편당 70만원이었어요. 집 한 채가 200만원이었으니 상당히 많은 편이었지요. 그것도 낭비하지 않고 저축하거나 재투자했어요. 부동산도 샀지만 거의 팔지 않았어요. 매매차익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모은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김수용 감독이 저를 보면 ‘신 재벌’이라고 놀렸습니다. 재산을 지닌 것에 부담감이 있었어요. 언젠가는 되돌려주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현금으로 기부할까도 생각했습니다. 때마침 부동산 개발업자가 찾아와 명보극장을 500억원에 팔라고 하더군요. 다른 용도로 개발하겠다는 거예요. 스카라극장은 오피스빌딩으로, 국도극장은 호텔로 바뀐 상태였어요. 고민했습니다. 충무로는 영화사를 간직한 거리였고 명보극장은 ‘연산군’과 ‘빨간마후라’를 상영한 곳이었죠. 그때 아들이 영화계를 위해 기증하라고 권하더군요. 그게 아버지가 영원히 사는 길이라면서. 맞는 말이더군요.”

▷기부한 재산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요.

“영화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면서 인재 양성에 써달라고 말하고 저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설립해 바로 환원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국민배우 안성기 씨가 이사장이며 50년간 영화계를 취재한 대기자 김두호 인터뷰365 회장이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매년 영화인과 연극인 자녀 8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와 단편영화 감독들에게도 지원합니다. 어린이들이 영화인의 꿈을 갖도록 영화캠프도 운영합니다. 연말에는 기부정신을 가진 예술인에게 시상도 합니다. 주요 문화예술 행사들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고요. 지난 2년을 돌아보면 기부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신영균은 서울대 치대 출신 영화배우…'5인의 해병' 등 317편 출연

1928년 11월6일 황해도 평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해 동대문 흥인초를 다녔다. 한성중·고교를 졸업하고 ‘청춘극장’에 입단해 신극운동에 참여했다. 서울대 치과대에 진학해서도 연극부를 창립해 연기를 계속했다. 6·25전쟁 이후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58년 치과 병원을 개업했다. 1960년 조긍하 감독의 제안으로 영화 ‘과부’로 데뷔했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20년간 톱스타로 군림하며 ‘연산군’ ‘빨간마후라’ ‘5인의 해병’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 한번’ 등 317편에 출연했다.

1968년부터 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예총회관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고 국내 단체 처음으로 의료보험조합도 설립했다. 15~16대 국회의원(한나라당)이었을 때에는 6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회문화예술위원회를 창립, 국내외 문화 예술을 활성화하는 데 힘썼다.


부산=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