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수많은 전폭기들이 산업단지를 융단폭격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적국의 전쟁역량을 지탱해 주는 핵심시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 글로벌 경제전쟁 시대에 한국의 핵심 역량인 수출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산업은 무엇일까.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바로 화학산업이다. 2011년 수출 777억달러(총 수출의 14%)를 달성하며 무역 1조달러 시대 개막에 앞장섰다. 넓은 의미의 화학산업은 가솔린 경유 등 석유제품과 합성수지와 합성고무, 섬유 등을 포함하고 있다. 스마트폰, LED(발광다이오드) TV 등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등 수출 주력제품에 포함된 기초소재와 원료도 대부분 화학제품으로 이뤄져 있다.

화학산업은 미래 성장동력으로도 주목받는 첨단분야다. 선진국에서 일찌감치 차세대 먹거리로 선정된 태양광, 연료전지, 바이오플라스틱도 화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연구·개발(R&D)이 추진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먹고 있는 약도 대부분 화학기술로 만들어진 합성의약품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주력산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화학산업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국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인식돼 왔다.

한국의 화학산업은 산업화 초기인 1960년대 이후 국가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기적 같은 압축성장을 이뤘다. 생산 규모로 세계 6위의 화학대국으로 성장했다. 명실공히 국가 핵심산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높아진 화학산업 위상에 걸맞게 2009년에는 울산석유화학단지를 준공한 1972년 10월31일을 기념하여 ‘화학산업의 날’을 제정했다. 매년 범국가적인 행사를 통해 화학인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청소년들에게는 미래 화학인재의 꿈을 키워나가도록 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산학연과 정부, 국회가 한자리에 모여 대한민국 화학산업이 지속 발전할 수 있는 해법을 고민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한국 화학산업은 중동국가들의 글로벌 시장 확대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원유만 수출하던 중동지역에서 직접 석유제품을 만들어 중국 등 거대시장에 팔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촉발된 값싼 에너지 셰일가스의 등장은 혁명에 가까운 기술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원유를 기반으로 성장한 화학산업이 원유값의 6분의 1인 셰일가스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으로 신속하게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발등의 불’은 정밀화학분야다. 고가의 첨단제품 속에 숨겨진 고부가가치 소재들은 아직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꿈의 소재로 일컬어지는 탄소소재의 개발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탄소섬유, 탄소나노튜브, 그래핀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진 탄소소재는 산업현장에서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수출경쟁력을 높여주는 핵심 소재다. 최근 글로벌 화학기업 듀폰과 국내 화학기업 코오롱이 슈퍼섬유를 놓고 벌이는 특허소송은 정밀화학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위기를 풀어줄 근본 해법은 국가적 차원에서 화학산업을 블루오션으로 인식하고 산학연에 분산된 인력과 재원을 명확한 비전과 전략을 통해 응집시키는 길뿐이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국 경제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온 화학산업이 이제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기 위해 ‘화학산업의 날’을 맞아 화학관련 단체와 원로들의 지혜가 담긴 ‘미래 화학산업 발전전략’을 제시한다. 우리나라가 미국 독일 일본처럼 확실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부터 수출 1위의 화학산업에 대한 R&D 역량을 강화하고 지속성장이 가능한 선진국형 산업구조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화학 강국 KOREA’는 세계 경제의 깊은 불황 속에서 도약과 추락의 갈림길에 서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긍정의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은 전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거친 역사를 거치면서 남다른 위기극복 DNA를 지녔다.

김재현 < 한국화학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