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9일자 한국경제신문 보도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 9월 말 국회에 제출한 2013년 국민건강증진기금 예산 2조747억원 중 건강증진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6187억원(29.8%)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는 국민건강보험 지원에 1조198억원(49.2%), 연구·개발사업에 2590억원(12.5%) 등을 쓰는 것으로 돼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 등의 자료를 인용한 이 보도를 통해 보면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만든 기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 마치 배가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형국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본연의 목적 외에 기금이 쓰이다보니 재정건전성이 나빠져 오히려 외부에서 빚을 끌어다 써야 할 정도라니, 국민건강증진기금을 제안하고 만드는 데 직접 관여한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국민건강증진기금은 1995년에 제정된 국민건강증진법에 사용처가 명시돼 있다. 국민건강증진법은 국민에게 건강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심어주고 책임의식을 기르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는 건강에 관한 바른 지식을 보급하고 국민 스스로 건강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국민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1997년 국민건강증진기금 조성 이후 국민건강증진법에 명시된 목적에 쓰인 재정 규모는 최대 30%를 넘지 않았다. 지난 15년 동안 계속 기금 사용 목적 이외에 더 많은 부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건강증진법에 명시된 기금 사용 목적이 잘못된 것인가? 그만한 기금이 필요 없는데도 이름만 걸어놓고 다른 목적으로 써도 된다는 것인가? 보건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의견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건강증진법에 명시된 건강증진사업이 우리 국민 건강을 지키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발간한 ‘2011 건강일람(Health at a Glance 2011)’에 따르면 2010년 심혈관질환, 당뇨병, 암, 만성호흡기질환 등 만성질환(NCD·Non Communicable Disease)은 우리나라 전체 사망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만성질환은 금연, 절주, 운동, 건강한 식습관 등을 통해 예방과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유엔에서도 만성질환에 관한 심각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1년 9월 뉴욕에서 ‘만성질환의 예방과 관리에 관한 정상회의’를 개최, 정책헌장을 채택했다. 유엔에서 정상회의 의제로 질병 문제를 논의한 것은 에이즈 이외에 만성질환이 유일하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만성질환의 예방과 관리를 위해 1995년에 국민건강증진법을 제정하고 국민건강증진기금을 조성했다. 국민건강증진법 제25조에 따르면 국민건강증진기금의 사용처가 명확히 제시돼 있다. 금연교육 및 광고 등 흡연자를 위한 건강관리사업, 건강생활의 지원사업, 보건교육 및 그 자료의 개발, 보건통계의 작성보급과 보건의료 관련 조사연구 및 개발에 관한 사업, 질병의 예방검진관리 및 암의 치료를 위한 사업, 국민영양관리사업, 구강건강관리사업 등에 사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국민건강증진기금은 국민의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증진할 목적으로 조성된 기금이다. 따라서 이를 다른 목적으로 쓴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별도의 기금을 마련하거나 일반 예산에서 편성해야 한다.

지난 10월25일 경주에서 개최된 대한예방의학회 추계학술대회 특강 ‘유엔 NCD 선언문 실천을 위한 예방의학회의 역할 및 파트너십’에서도 국민건강증진기금이 당초 기금 조성 목적에 맞지 않는 곳에 잘못 쓰여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학회에 참석한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 바 있다.

이렇듯 국민건강증진기금이 건강증진과 질병예방에 올바르게 쓰이지 못한다면, 국민의 건강을 지킬 수 없다. 정부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건강을 가장 우선으로 해 정책을 수립해 나가야 한다. 국민건강증진기금, 바르게 써야 한다.

서일 <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예방의학교실 isuh@yuhs.a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