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성과는 계약결혼에 바탕을 둔 사르트르와의 관계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가 만년에 집필한 자서전은 그를 흠모하던 수많은 추종자들을 실망시켰다. 실존주의 탄생의 산파, 여성해방운동의 어머니, 콩쿠르상에 빛나는 최고의 문인 등 자신이 이룩한 수많은 성취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게 고작 사르트르(1905~1980)와의 부부관계였다니. 그러나 실망감을 가라앉히고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부아르 말의 본뜻을 이해할 수 있다.

보부아르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만난 것은 소르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에콜 노르말에서 교수자격시험 준비강좌를 청강하면서였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의 미모와 날카로운 지성에, 보부아르는 160㎝도 안 되는 단신이지만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인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기에는 갈 길이 바빴다. 둘은 1929년 치러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나란히 1, 2등을 차지한다. 시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2등인 보부아르가 수석인 사르트르보다 더 뛰어났다고 수군거렸다. 보부아르는 당시 21세로 합격, 최연소 철학교수자격 취득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합격자가 발표되자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당신은 합격했소. 그러니 이제 당신은 내거요.”

그런데 사르트르의 이 도전적 고백은 전통적인 의미의 청혼이 아니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계약결혼을 제의했다. 계약기간 동안 서로는 다른 상대자와 열애에 빠져도 이를 문제 삼지 않으며 다만 외도 사실을 한치의 거짓 없이 상대방에게 알려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었다. 열정을 억누르지 말고 자연스레 발산하자는 것이었다. 둘은 우선 2년간 살아보고 재계약한다는 데 합의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아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부부관계였다. 일부에서는 가족제도를 파괴하는 폭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여성의 창조적인 본성을 억누르고 오직 집안일과 육아에 전념하는 가사노동자로 전락하게 한다고 믿고 있던 보부아르로서는 이런 사르트르의 제안이야말로 여성을 완성된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이상적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49년에 발표한 명저 ‘제2의 성(性)’에서 “부부가 단지 서로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 평생 동안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상대방을 구속하는 것은 정말 부조리한 것”이라며 전통적인 결혼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누가 봐도 이런 ‘신사협정’의 최대 수혜자는 보부아르일 것처럼 보였다. 늘씬한 몸매에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그에게 단신인 사르트르보다 더 많은 사랑이 기다릴 것 같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사르트르는 카사노바 뺨치는 바람둥이였다. 그가 만난 여자들을 열 손가락으로 꼽는 것은 부질없을 정도다. 반대로 보부아르가 만난 ‘외갓남자’는 미국의 소설가인 넬슨 알그렌 등 소수에 불과했다. 사르트르의 예기치 못한 외도로 보부아르는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내심 질투심으로 불타올랐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보부아르는 외도를 하다가도 사르트르와의 지적 연대를 위해 서둘러 관계를 정리했다. 사르트르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파트너임과 동시에 정신적 동지였기 때문이었다. 그와의 단절은 곧 미완성을 의미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나갔고 사르트르 역시 그의 도움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사르트르의 대부분 저작은 보부아르의 손을 거쳐 출판됐다. 둘은 서로를 지적으로 완성해주는 완벽한 결합체였다.

사랑의 열정보다 두려운 것은 그로 인한 연대감의 파괴였다. 보부아르가 여성해방을 부르짖을 때 사르트르는 힘을 보탰고 사르트르가 프랑스의 알제리 저항운동 탄압에 반대할 때 보부아르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의 결혼을 인생 최고의 성공작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혼계약의 연장은 당연했고 그런 관계는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51년간 지속됐다. 그리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둘은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묻혔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파리시 당국은 센강에 37번째 다리를 세웠다. 유선형의 이 아름다운 다리는 보부아르의 이름을 따 시몬 드 보부아르교라고 이름 붙여졌다. 다리는 미테랑도서관과 베르시공원을 잇는다. 전자는 학문의 전당이고 후자는 로맨틱 공간이다.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보부아르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가 교차하는 듯한 형상의 다리는 마치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보듬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의 구별을 떠나 동지적 인간애로 넘칠 때 비로소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그것은 시대를 앞서간 보부아르라는 제2의 성(여성)에게 바쳐진 당연한 기념비였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