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여대생은 한 줌의 재가 돼 돌아왔다. 영화를 보고 귀가하던 길 야간버스를 탔던 게 화근이었다. 그는 지난해 12월16일 인도 델리의 버스에서 버스기사와 승객 등 6명에게 성폭행당한 뒤 알몸으로 길거리에 버려졌다. 함께 있던 남자친구도 이를 막으려다 구타당했다. 여대생은 세 차례의 수술로도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 29일 그는 끝내 숨을 거두고 화장됐다. 사망 원인은 심한 구타로 인한 장기파열. 오는 2월 결혼을 앞두고 있던 예비신부였다.

이후 인도는 비탄과 분노로 들끓고 있다. 뉴델리의 잔타르만타르광장은 연일 수천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찾는 시위장소로 바뀌었다. “인도라는 나라가 그를 죽였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다. 인도인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을 당연시 여기는 오랜 악습에서 벗어나 ‘여성 인권’을 말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델리 버스 성폭행을 ‘인도의 로자 파크스 버스 사건’에 비유했다. 로자 파크스는 1955년 미국 버스에서 백인석에 앉았다가 체포돼 흑인 인권 운동에 불을 지폈던 인물. 그의 체포 이후 흑인들은 승차거부 운동을 벌여 인종차별 버스 탑승 제도가 위헌이란 판결을 받아냈다. 인도의 집권 여당인 국민의회의 소니아 간디 대표는 “피해자의 죽음으로 성폭력에 관대했던 인도 사회가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분노한 인도인들

시위는 3주째 이어지고 있다. 규탄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가해자 6명을 넘어 인도 정부다. “성폭력을 중단하라”는 시위대의 외침은 “정부의 정의를 요구한다”는 구호로 바뀌었다.

정부의 안일한 대처가 대중의 분노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위대에 물대포와 최루탄을 쐈다. 국회의사당과 대통령궁, 정부기관은 문을 닫았다.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만모한 싱 총리가 특별담화를 발표했지만, 끝낼 때 “(촬영이) 잘됐나?”라고 묻는 부분까지 방송되는 바람에 조롱만 받았다. 현지 매체 더힌두는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부패한 경찰과 관료, 이에 따른 치안 공백에 이를 갈던 시민들이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뉴델리의 경찰 인력은 8만4000여명. 그러나 실제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이 중 3분의 1뿐이다. 나머지는 정치인 등 고위 인사 경호에 투입된다. 인도의 경찰이 상위 계급만을 위해 일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다. 뇌물에 목매는 경찰도 많아 “거리의 깡패보다 경찰이 더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부실한 사법 체계도 비난의 대상이다. 인도 국민 100만명당 판사 수는 15명. 사법제도가 후진적이라 평가받는 중국(100만명당 159명)보다 더 열악하다. 현재 인도 법원에 계류 중인 성폭행 관련 사건은 4만~10만건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사건 처리가 느릴 수밖에 없다. 2011년 신고된 인도의 성폭행 2만4206건 중 유죄로 확정된 비율은 26.4%에 불과했다.

시위대의 요구는 현재 무기징역까지만 구형 가능한 성폭행의 최고형을 사형까지 올리자는 것이다. 관련 법안엔 피해자의 이름을 붙이자는 주장도 나왔다.

◆뿌리 깊은 차별

그러나 제도 개선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인도의 성폭력 문제엔 뿌리 깊은 성·계급 차별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여성 경시 문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이브티징(eve-teasing)’이란 힝글리시(인도식 영어)다. 이브티징은 성추행을 미화한 말로 여성에게 무해한 행위란 뉘앙스가 담겨 있다. 이 같은 남성들의 인식 때문에 인도 여성들은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보다 성추행이 잦은 출근길을 참아내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할 정도다.

성범죄가 일어나도 여성의 행실만 탓하는 경우가 많다. 라자스탄주의 한 의원은 “성폭력 사건이 늘어난 건 사립학교 여학생들의 치마 교복이 짧기 때문”이라며 “짧은 치마를 금지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성차별 문제는 카스트 제도로 대표되는 인도의 계급 차별과 얽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인도는 여성의 지위가 양극화된 사회다. 인도에서 높은 지위의 여성들은 정치적 지도자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1990년대 초 경제 개혁 이후 양성 평등 문화가 고위 계급에서 자리잡은 영향이다.

그러나 하층 계급 여성들의 인권은 여전히 바닥이다. 고위층에 집중된 정부의 치안 서비스를 누리지도 못한다. 지난해 신고된 뉴델리 성폭행 661건 가운데 상류층 피해는 단 1건, 나머지 피해자는 모두 중산층 이하 여성이었다.

BBC는 “이번 사건도 피해자가 부유한 중산층이라 그나마 공론화된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소외된 중산층 이하 여성들의 성범죄 피해 문제를 지적했다.

경제 개혁이 진행될수록 빈곤 계층 여성들의 성폭행 노출 빈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불만을 가진 남성들이 성폭력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이후 중산층 이하 대상 성폭행 건수는 30% 이상 늘었다.

◆바뀔 수 있을까

시위대의 기대는 이번 사건이 인도의 여성 경시, 계급 차별 문화를 깨뜨릴 도화선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성폭행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 자체가 여성 인권 의식이 성장했다는 증거란 설명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전엔 흔하다는 이유로 거의 다루지 않았던 성범죄를 현지 언론들이 보도하기 시작했다”며 “성범죄가 사적 문제에서 공적 사안이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도 공산당 소속 하원의원인 브린다 카라트는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함께 저항했다는 것”이라며 “이런 경험이 여성들의 삶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내년 총선까지 이 같은 목소리가 힘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인도 사회도 변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김우조 한국외국어대 인도어과 교수는 “인도의 가부장적 가치의 모순이 공론화되면서 인도인들 의식도 깨어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