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앉을 때 무릎을 꿇으라고? 저 의사 완전히 돌았나봐.”

1976년 덴마크에서 열린 한 의료 학회. 덴마크 의사 A C 만달 박사의 ‘호모 세덴스(Homo Sedens·앉아서 생활하는 인간)’ 연구 논문 발표가 끝나자 청중들은 모두 술렁이며 자리를 떴다. 손가락질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발표한 내용은 이랬다.

“의자에 직각으로 앉으면 척추의 곡선이 없어져 근육이 긴장하고, 디스크에 압력이 가해진다. 120~135도의 승마자세를 유지하는 게 가장 좋다. 더 중요한 건 앉았을 때 무릎을 꿇어 허리의 자연스러운 S자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고심 끝에 발표한 연구 논문이 학계의 심한 비판을 받자 만달 박사는 상심했고, 제품 개발의 뜻을 접었다. 대신 측근이자 뜻을 같이했던 디자이너 피터 옵스비크에게 최적의 의자 설계도를 건넸다.

명품 유아용 의자 트립트랩 디자이너로도 유명한 스토케사 옵스비크는 1979년 만달 박사의 인체공학적 설계를 접목한 의자 ‘배리어블 밸런스(Variable Balance)’를 내놨다. 단순한 원목의 곡선형 지지대, 엉덩이와 무릎 받침대가 전부인 이 의자는 1980년대 유럽과 미국을 강타했다. 척추 질환을 앓는 환자나 성장기 어린이를 위해 병원과 학교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만달 박사가 ‘인체공학적 의자’를 주장해 비웃음거리가 된 지 34년. ‘배리어블 밸런스’는 여전히 스테디셀러다. 노르웨이 의자 전문 브랜드 바리에르(Varier)는 세계 40개국 1400여곳에 수출해 연매출 2800만달러(약 298억원)를 올리는 글로벌 의자 전문기업이 됐다. ‘닐링 체어(Kneeling Chair)’ ‘밸런스 체어(Balance Chair)’ 등 ‘배리어블 밸런스’를 모방한 제품도 수십여종이나 쏟아져 나왔다.


◆인체공학, 디자인을 입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대신 기본과 기능에 충실하다. 같은 디자인으로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다. 바리에르는 지금까지 총 17종의 의자를 내놨다. 각각 새로운 디자인을 강조했지만 디자인보다 앞선 한 가지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몸은 움직이도록 설계됐다. 한 자세로 오래 있게 하지 말라.’

바리에르는 ‘변화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리에르 의자는 바닥면에 곡선을 넣거나 의자가 360도 방향으로 15도씩 움직이도록 설계됐다. 흔들의자처럼 자연스럽게 가벼운 롤링(좌우 흔들림)이 가능하다. 앉은 채로 앞뒤 반동을 주면 네댓 번 요추를 자극해 허리 근육과 인대가 강화되는 원리다. 척추 질환이 없더라도 같은 자세로 10분 이상을 유지하면 척추 사이에 물이 마르면서 신경을 자극하고 자세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원리를 도입했다.


바리에르는 ‘배리어블 밸런스’의 인기가 채 식기도 전에 1983년 또 하나의 충격적인 제품을 선보였다.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그래비티(Gravity)’다. 각도에 따라 무릎을 꿇듯이 앉게 되는 1단계, 바닥과 거의 수평이 되는 4단계까지 응용이 가능하다. 4단계에서 눈을 감고 1분이 지나면 마치 무중력 상태로 떠 있는 것 같은 상태를 느끼게 되고, 3~5분 이내에 잠들 수 있게 설계했다. 이 의자는 완전히 뒤로 젖혔을 때 심장보다 발이 더 위에 놓여 빠른 시간에 뇌에 혈액을 공급, 극한의 휴식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옵스비크는 “의자에 앉는 사람이 최대한 다양한 자세로 변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디자인의 목표”라며 “오랜 관행 같았던 전형적인 앉는 자세를 개선해 나가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주방에서 거실까지 영역 확장

병원과 학교에서 인기를 끌던 바리에르는 주방에서 사무실, 거실까지 영역을 넓혔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환자와 어린이뿐만 아니라 생활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의자가 각광받았다. 일본 등 아시아 시장에서의 수요도 늘었다. 이미 두 개의 베스트셀러를 갖고 있었지만, 또 한번 혁신을 시도했다.

홈 바에 어울릴 것 같은 긴 외다리의 의자 ‘무브’는 주방에서 사랑받았다. 높이 조절은 물론 360도 회전이 가능한 데다 초경량으로 설계했다. 앉았을 때 130도 각도를 유지하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이 의자는 등과 배 근육을 강화해주는 기능을 내세웠다.

너무 경사진 의자에 적응하기 힘든 노년층을 위해 ‘액틀럼’도 내놨다. 125~130도인 다른 의자의 각도와 달리 115도의 각도를 유지시켰다. 휘어진 다리 받침은 안락함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몸의 균형을 잡았다.

‘배리어블 밸런스’의 구조에 어깨와 등받이를 추가한 ‘댓싯’은 사무실에서 환영받았다. 1992년 출시한 이 의자는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면서 회사의 매출을 견인한 효자 상품이 됐다.

◆제작 방식은 전통 그대로

디자인에는 경계를 없앴다. 두 명의 수석 디자이너가 있지만 외부의 아이디어도 적극 받아들였다. 1965년 스벤 이바르 디스테어가 만든 우주 행성 모티브의 의자는 바리에르를 만나 더 편안한 구조를 갖췄다. 1972년 테르제 엑스트롬이 디자인한 의자는 기하학적 구조에 편안함을 더해 ‘엑스트렘’으로 재탄생했다. 오렌지 껍질을 모티브로 한 ‘필’과 곡선을 활용해 사무실용 의자로 만든 ‘데이트’는 접견실 및 회의실에까지 놓게 되는 인체공학 의자 붐을 일으켰다.

국내에서 바리에르 의자의 판매가격은 대당 100만~700만원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바리에르 의자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장 가운데 하나다. 바리에르 관계자는 “교육열이 높고 건강에 대한 관심도 많아 한국 시장은 아시아에서도 크게 집중하고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바이에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너도밤나무를 재질로 사용하고, 이탈리아산 천연 송아지 가죽을 고집한다. 기계 조립이 아닌 장인이 손으로 만들고, 의자는 대부분 뼈대가 모두 분리된다. 모든 의자에는 지퍼를 달아 원하는 색으로 바꾸거나 세탁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바리에르는 1990년대 초부터 다른 기업들이 인건비를 줄이려고 중국이나 동남아로 생신기지를 옮길 때도 꿈쩍하지 않고 노르웨이 현지 생산을 고수했다. 인건비 등 가격 경쟁력보다는 품질을 높이고 디자인을 연구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가구업체가 디자인으로 승부할 때 실용성과 편안함을 버리지 않았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