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빈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36·사진)는 2011년 9월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IMF 본부에 들어간 새내기 사원이다. 앞으로 1년 반 더 일하면 ‘수습’ 딱지를 떼고 정규 직원이 된다. 권위가 뒤따르는 ‘IMF 이코노미스트’라는 명예도 주어진다. IMF 수석이코노미스트 출신인 케네스 로고프(미국 하버드대 교수), 사이먼 존스(MIT 교수), 라구람 라잔(시카고대 교수) 등과 같은 경제학계의 거물들과 동급이 되는 셈이다. 물론 ‘수석(chief)’이란 글자를 빼면 말이다.

그를 이코노미스트라는 인생 좌표로 이동시킨 것은 대학시절 방황이었다. 16년 전 연세대 금속공학과(96학번)에 입학하면서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명문대 진학이라는 기쁨도 잠시였다. 무미건조한 전공수업이 결정타였다. 전공과목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교양수업은 빼먹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2년이 흘렀다. 학점은 모두 ‘경고’ 수준이었다. 희망이 없던 공학도 안씨.

“수능점수에 맞춰 대학을 선택하고 학과를 고르다 보니 공대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방황은 적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시험점수에 따른 전략적 학과 선택이 빚은 비극이었다.

젊음이 ‘허락한’ 나태를 실컷 맛본 그는 군에 입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제대 후엔 더 막막했다. 뒤늦게 전공수업을 따라가려니 힘에 부쳤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될 무렵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비수를 찔렀다. “도대체 언제 공부하려고 하니? 나는 비전 있는 남자가 좋더라.” 사실상 이별 통보였다.

예쁘고 마음씨 착한 여친의 한마디는 충격이었다. 복학한 뒤 경제학원론을 교양과목으로 수강하던 차였다. 전공수업에선 찾지 못했던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전공은 이미 포기한 상태이니 부전공이라도 잘해보자는 마음으로 경제학 부전공을 선택했다. 공업수학을 적용하니 미시경제, 거시경제 문제도 술술 잘 풀렸다. 공부에 시동이 걸렸다. 부전공 학점이 모두 A였다. 여자 친구를 잡아야 한다는 심정에 도서관에 발붙이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경제학과 대학원 문을 두드렸다. 주위에선 “공대생이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버틸 수 있겠느냐”고 말렸다. 그는 모험을 택했다. 다행히 대학원 교수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그는 대학원을 수석 졸업했다.

취업할까 생각했지만 “공부를 끝까지 해보자”며 용기를 냈다. 유학 문을 두드렸다. 간신히 3.0을 넘은 학부 학점이 걸렸다. 뜻밖에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공대생이 경제학과 대학원에 가고, 성적도 크게 향상된 것을 보고 잠재성을 높게 평가한 것 같아요.”

안씨는 자신에게 비수를 꽂았던 바로 그 여친과 결혼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컬럼비아대 기혼자 기숙사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넉넉지 않았다. 2년째부터 강의조교와 연구조교를 하면서 학교에서 매달 2000달러 정도의 생활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둘은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6년 동안 유학할 때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요. 영어실력도 부족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고, 한국에도 딱 한 번 들어갔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 1~2년차 때는 매일 도서관에서 8~10시간을 보냈다. “한국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외국 학생들은 맺고 끊는 게 보이는데 우리는 토요일, 일요일 심지어 추수감사절에도 도서관을 나갔습니다.”

3년차부터는 조금씩 여유를 찾았다. 커피도 마시고 아껴서 절약한 돈으로 가벼운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3~4년차인데도 월급이 없고 저축도 없어 늘 불안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2011년 1월 워싱턴DC의 포토맥강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어느 날 처음으로 워싱턴을 찾았다. IMF행 최종 관문인 심층면접(논문 심사와 패널 인터뷰)을 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그는 신혼 6년간을 12평짜리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며 응원해 준 아내 생각에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1주일 후엔 미국 중앙은행(Fed) 면접시험을 보러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Fed와 IMF에서 합격통지서가 잇따라 날아왔다. Fed는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신참 이코노미스트에게 세전 연봉 15만달러를 제시했다. 세금을 내지 않는 IMF의 연봉은 10만달러를 조금 넘었다. 세후로 비교하면 Fed와 엇비슷한 수준.

“Fed는 미국 기관이지만 IMF는 국제기구잖아요. 한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겠다는 생각에 IMF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요즘 ‘금융위기와 무역침체의 상관관계’에 대한 실증논문을 쓰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신용장거래 등 무역금융이 무너지면서 글로벌 교역침체를 불러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이다.

“지난 6년 동안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좁았다고 생각해요. 정년 보장이 되는 교수는 ‘신(神)’이었고 교수가 되면 성공, 안 되면 실패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죠.”

그는 “무엇보다 학술연구와 함께 정책결정을 자문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게 뿌듯하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던진 한마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

IMF 年 20~40명 채용
한국인 30여명 근무…초봉 10만달러 넘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일하는 정규 직원들은 사무지원 인력을 빼면 대부분 석·박사 학위를 가진 이코노미스트다. 경제학 박사만 수백 명에 이른다.

직원 채용은 신규와 경력 채용 두 가지로 나뉜다. 신규 채용자는 다만 3년간 정규 직원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습득하게 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매년 9월 IMF의 인터넷 홈페이지 공고를 시작으로 채용절차가 시작된다. 서류심사→1차 면접(화상 면접 또는 대면)→2차 면접(논문심사와 패널 인터뷰) 과정을 거친다.

지원 요건은 경제 분야 석사 학위자 이상이지만 사실상 박사 위주로 뽑는다. 34세 이하의 IMF 회원국 국적자로서 유창한 영어실력도 요구된다. 채용인원은 매년 20~40명. 전 세계적으로 지역별 안배도 고려된다. 미국과 유럽지역 인력에 편중돼 있다는 지적에 따라 최근에는 국적이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도 지난 2~3년간 조금씩 늘어 현재 한국 국적의 이코노미스트(파견 공무원 제외)는 30여명에 이른다.

경력직 채용은 중간 관리직급의 결원을 채우기 위해 수시로 이뤄진다. 5~15년간 경제정책 분야(재무당국, 중앙은행, 국제금융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자가 대상이다. 한국은행이나 금융감독원에서 일하다 IMF 이코노미스트로 변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IMF 이코노미스트의 초봉은 10만달러, 10년 이상 근무하면 20만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 교수로 쉽게 자리를 옮길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다.

미국 워싱턴DC의 IMF 본부 건너편에 있는 국제금융기구 월드뱅크에서도 한국인 이코노미스트가 40여명 일하고 있다. 비정규직인 컨설턴트를 포함하면 100명이 넘는다. 월드뱅크는 매년 30~40명의 박사 학위자를 신규 채용한다. 석사 학위자(28세 이하)를 뽑는 별도 프로그램도 있다. 국가별 모집정원이 있으며 한국은 현재 2명이다.

전 세계에서 매년 매출되는 경제학 박사는 1000여명이다. 이들은 IMF와 월드뱅크, 미국 중앙은행(Fed) 그리고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회사, 각 대학의 교수직 채용 때 구름처럼 몰려다닌다. 매년 1월 열리는 미국경제학회 연례총회는 경제학 박사들의 채용박람회나 다름없다. 대학이나 금융기관이 연례총회가 열리는 호텔의 ‘뒷문’에서 자리잡고 4일간 채용면접을 진행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