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플레이 장비업체 적자늪 허덕
경기도에 있는 디스플레이 장비업체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B상무. 그는 요즘 하루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씨름 중이다. 주요 고객인 삼성과 LG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투자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지만 구매 담당자 목소리조차 듣기 힘들다. 그는 “고객사가 투자 계획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어 연간 목표 수립을 포기해야 할 판”이라며 “협력사 사이에 ‘대기업 투자 계획을 알아내는 게 목표’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고 하소연했다.

경기도에서 액정표시장치(LCD) 장비업체를 운영하는 K사장은 경영계획을 네 가지 방향으로 세웠다. 고객사의 투자 규모를 ‘가정’하고 그에 따라 각각 매출 목표를 달리 정한 ‘시나리오’ 경영이다. 그는 “작년 매출은 전년 대비 반토막 났다”며 “올해 목표는 생존”이라고 푸념했다.

지난해 보릿고개를 맞은 디스플레이 장비업계에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주요 고객인 대기업이 투자 계획을 세우지 않는 데 따른 불확실성에 수주 가뭄, 엔저(低)까지 가세해 ‘삼중고(三重苦)’를 호소하는 기업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의 고충은 실적에서 엿볼 수 있다. 참엔지니어링은 작년 매출이 전년 대비 74% 급감한 508억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영업손익은 전년 195억원 흑자에서 153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신성에프에이도 2011년 16억원 흑자에서 작년 85억원 적자로 전환했다. 매출은 1421억원에서 532억원으로 62% 감소했다. 이들처럼 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장비업체들이 수두룩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마지막으로 수주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며 “엔저 탓에 일본 경쟁사보다 가격 경쟁력이 낮아져 입찰이 있어도 예년처럼 쉽게 따내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비용 절감을 위해 구조조정을 고민하는 기업들도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장비업체 사장은 “10년 넘게 사업한 이래 지난해 처음 전체 인력의 25%를 구조조정했다”며 “살아남으려면 또다시 인력을 감축해야 하는데 직원들 얼굴이 떠올라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불확실성을 걷어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올해 투자 계획을 가늠할 수 있어야 그에 맞춰 탄력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투자 계획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은 기술 표준을 둘러싼 전략적 고민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김양재 우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LCD도 그렇지만 특히 OLED는 아직 기술 표준이 100% 확립되지 않은 신기술”이라며 “삼성, LG도 몇 세대 라인에 투자하는 게 최선일지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 같다. 투자 계획 자체가 전략이기 때문에 후발 업체들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 유기발광다이오드

OLED.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디스플레이를 말한다. 액정표시장치(LCD)보다 동영상 응답 속도가 훨씬 빠르면서도 전력 소모량은 적어 ‘꿈의 디스플레이’로 불린다. 지금은 주로 스마트폰에 사용되며 1~2년 내 TV에 탑재될 전망이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