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위축 신호…디플레의 전조"
가전과 자동차 등 내구재 물가가 13개월 연속 하락(전년 동월 대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이후 최장기간이다. 그러다보니 ‘빛이냐 그림자냐’ 해석이 분분하다. 기술혁신으로 가격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분석과 제조업 전반의 위축신호라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혁신의 성과?

12일 통계청의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내구재 물가지수는 전년 동월보다 0.5% 떨어져 13개월 연속 하락행진을 이어갔다. 2005년 3월~2007년 9월(31개월 연속) 이후 전년 동월 대비로는 최장기간 하락세다. 내구재값은 금융위기가 몰아친 2009년 6.2% 뛴 적도 있지만, 지난해 1.5% 하락세로 돌아섰다.

내구재는 자동차, 컴퓨터와 통신기기, 가전 등 1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비교적 고가의 제품을 말한다. 지난달 기준 사진기 가격은 전년 동월보다 16.7% 급락했고, 휴대용 멀티미디어기기(-13.2%) TV(-12.8%) 모니터(-12.1%) 노트북컴퓨터(-8.5%) 등의 가격도 잇따라 떨어졌다.

이내성 통계청 물가동향과 사무관은 “공업제품의 경우 기술혁신에 따라 주기적으로 가격하락세를 보이곤 한다”며 “고가였던 LCD TV가 중국산 제품 등의 보급 확대로 가격이 떨어진 요인도 작용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특히 영상·음향기기의 경우 신제품 출시가 잦아지면서 기존 제품의 가격이 빠르게 내렸고, 내구재값 장기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불황 마케팅 ‘반값 TV’

불황에 따른 수요 위축이 내구재 물가하락의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소비자들은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생필품 대신 내구재 소비를 먼저 줄이게 된다. 지난해 3분기 2인 이상 가구의 소득(평균 414만원) 가운데 소비지출(246만원)은 59.6%로 최근 10년 새 최저치를 나타냈다. 무더위 탓에 여름철 에어컨 구매가 늘고, 개별소비세 인하로 승용차 판매가 활기를 띠기도 했지만 계절적·정책적 영향이 컸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내수 부진에 직면한 유통업체들이 ‘반값 TV’ 등 가격파괴 경쟁에 돌입했다”며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선 내구재값 하락이 한국보다 1~2년 일찍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물가 안정의 숨은 공신

내구재값 하락은 물가 안정의 숨은 공신이다. 하지만 서민들은 구매빈도가 낮아 이를 느끼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농산물(8.7%) 섬유제품(4.6%) 등 생필품 가격은 지난해 크게 올라 고충이 더 컸다. 내구재와 비내구재 물가의 양극화는 2011년 일본이 겪은 현상이다. 물가하락으로 경제가 가라앉는 디플레이션 와중에 생계비는 올라 서민들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와 고물가가 동시에 진행)’을 체감했다.

내구재 장기침체는 제조업 비중이 큰 한국에서 디플레의 전조가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소비위축으로 인해 자동차와 정보기술(IT) 등 핵심산업의 성장여력이 둔화되고, 근로자 소득이 제자리에 머물면서 다시 소비가 줄어드는 악순환의 가능성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물가 하락이 내구재에 그치고 있는데다 내수 비중이 일본보다 작아 이 같은 진단은 섣부른 측면이 있다”며 “최근 소비심리가 소폭 개선됐고 설비투자가 증가세로 돌아선 만큼 경기 회복 가능성도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