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 사태' 뛰어든 러시아, EU와 주도권 다툼
러시아 대통령궁인 크렘린.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키프로스 대통령은 19일 밤 11시(현지시간) 이곳으로 긴급 전화를 걸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키프로스 의회가 방금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10억유로 구제금융안 비준을 반대 36표, 기권 19표로 부결시켰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키프로스가 유로존이 아닌 러시아에 도움을 청한 것은 자국 은행예금 총액 700억유로 가운데 34%인 240억유로(약 34조원)가 러시아 자금이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정부가 채권단인 트로이카(유럽중앙은행, IMF, 유럽연합) 요구에 따라 구제금융 비준안에 예금자에게 부담금(2만~10만유로는 6.75%, 10만유로 초과는 9.9%)을 물리는 조건을 달았는데 여기에 친(親)러시아 인사가 대거 포진해 있는 의회가 찬성 한 표 없이 반대한 것이다.

◆구제금융 협상 뛰어드는 러시아

아나스타시아디스 대통령은 곧바로 미칼리스 사리스 재무장관을 러시아로 보냈다. 예금자 부담금 부과에 대해 반대하는 러시아로부터 자금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협의 첫날인 20일에는 별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에 따르면 사리스 재무장관은 키프로스가 2011년 러시아로부터 제공받은 차관(25억유로)의 상환 기간을 연장해주는 것과 키프로스 은행 지분과 에너지 자산 등을 담보로 수십억유로의 추가 차관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러시아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사리스 장관은 안톤 실루아노프 장관과의 회담 뒤 “협상은 건설적이었다”며 “합의에 이를 때까지 러시아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은 불투명하지만, 결국은 러시아가 키프로스를 지원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러시아로서도 키프로스 금융 시스템 붕괴를 손 놓고 지켜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은행에 있는 러시아 자금은 국내총생산(1조8580억달러)의 1.6%에 이른다. 키프로스가 부도나면 이 돈은 그대로 잠긴다. 국내의 한 러시아 전문가는 “대부분의 올리가르히(러시아 재벌)는 유동성이 넉넉하지 않아 키프로스에 자금이 묶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이들이 정치권을 압박해 러시아가 어떻게든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키프로스 은행휴업 연장

이 같은 키프로스의 움직임에 유럽연합(EU)의 심기는 편치 않다. 구제금융을 미끼로 러시아가 키프로스의 천연자원 개발권에 눈독을 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인근 해역에는 34억㎥의 천연가스와 2억3500만의 석유가 매장돼 있다.

당장 구제금융안을 주도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반발하고 나섰다. 메르켈 총리의 한 측근은 “키프로스의 구제금융 협상은 트로이카만을 상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프로스는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하는 동시에 트로이카에 제시할 새로운 대안도 준비하고 있다. 은행 예금자에게 부담을 물리지 않는 대신 50억유로 규모의 사회보장기금을 국유화하고 앞으로 개발될 천연가스 수익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트로이카가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메르켈 총리는 “키프로스 은행권은 반드시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금자에게 부담금을 물려야 한다는 기존 생각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키프로스는 또 뱅크런(대량 예금인출)을 막기 위해 은행 휴업을 한동안 연장하기로 했다. 파니코스 데메트리아디스 키프로스 중앙은행장은 “은행들의 영업이 재개되면 전체 은행 예금의 10%가 넘는 75억유로가 일시에 빠져나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경목/추가영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