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은 환율 변동에 따라 수출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원·달러 환율 하락이 지속될 경우 채산성 악화를 막기 위해서는 수출가격을 올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엔·달러 환율이 떨어질 때는 수출가격을 인상하고, 오를 때는 가격을 내리는 등 탄력적으로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환율 변동에 무방비로 노출

20일 한국은행이 2000~2012년 환율 변동과 수출가격 변화의 상관관계인 환율 전가율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 수출품 가격은 원·달러 환율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3년간 한국 수출가격은 원·달러 환율 1% 상승시 0.05% 올랐고, 하락시에는 0.06% 하락했다. 환율 변화에 따른 수출가격 변동이 거의 없어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결과라는 것이 한은 측 설명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한국 수출기업들이 가격 전략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마디로 환율 변동 리스크에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일본의 2000~2012년 환율 전가율은 한국과 판이하게 달랐다. 일본산 수출품 가격은 엔·달러 환율이 1% 오르면(엔저) 평균 0.25% 떨어지고 1% 떨어지면(엔고) 0.31%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엔고일 때는 수출 채산성 악화를 막기 위해 가격을 올리고 엔저 때는 고환율의 이점을 활용해 수출단가를 떨어뜨리는 등의 방식으로 가격 전략을 능동적으로 펼쳐왔다는 얘기다. 이 연구위원은 “최근 엔저가 일본 수출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으로 직결되는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제품 경쟁력으로 승부해야

이처럼 환율 변동이 한·일 수출기업들에 미치는 영향이 엇갈리는 이유는 양국의 수출산업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정보기술(IT) 제품, 자동차, 선박 등의 가격은 판매자가 아닌 소비자나 시장 수급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스마트폰, 승용차 등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최종 소비재로 소비자들이 가격에 민감하기 때문에 공급자가 가격을 쉽게 바꾸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의 주력 수출품인 부품·소재는 공급자의 가격 결정력이 상대적으로 크다. 2011년 일본 수출에서 부품·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35%에 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원화가 계속 강세를 보일 경우 그 부담을 시장에 전가하기 어려운 한국 수출기업들의 채산성 악화는 막을 길이 없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근본적으로 제품 경쟁력을 키우는 것 외에는 특별한 대응책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가격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의 독창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어야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환율 전가율

수출단가, 원자재 수입단가, 단위노동비용 등을 따져 환율 변화가 수출 가격에 영향을 주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 환율 전가율이 높다는 것은 해당국 통화가 강세를 보일 때 수출단가가 오른다는 의미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