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국민 위한 자동차…250만원짜리 '나노' 만들어…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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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CEO - 라탄 타타 <타타자선재단 회장>
M&A의 귀재
철강회사 코러스·고급차 재규어…과감히 인수해 글로벌 기업으로
취임 20년 만에 매출 1000억弗
사회적 책임 실천
100만원도 안되는 초저가 주택…수억 빈곤층에 '내 집 마련' 기회
안전한 식수 위해 정수기도 싸게
M&A의 귀재
철강회사 코러스·고급차 재규어…과감히 인수해 글로벌 기업으로
취임 20년 만에 매출 1000억弗
사회적 책임 실천
100만원도 안되는 초저가 주택…수억 빈곤층에 '내 집 마련' 기회
안전한 식수 위해 정수기도 싸게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기업. 모든 기업이 꿈꾸지만 이루기 쉽지 않은 목표다. 그 목표를 달성한 기업이 있다. 인도 최대 기업인 타타그룹이다. 인도에서 타타그룹은 한국의 삼성그룹에 해당한다. 자동차 통신 철강 화학 호텔 시계 차(茶) 등 업종에서 80개가 넘는 계열사를 두고 있다. 지난해 인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매출 1000억달러를 올렸다.
이런 성공 뒤에는 20여년 동안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타타그룹을 성장시킨 라탄 타타 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가 강조하는 기업철학은 ‘더 많은 국민이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하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과 동시에 어렵게 생활하는 인도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인도 최대 기업의 회장이면서도 작은 아파트에 살고, 소형차를 모는 검소한 생활로 인도 국민에게 높은 신망을 얻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08년 그를 ‘가장 존경받는 리더’로 선정하기도 했다.
○적극적 인수·합병으로 몸집 불려
타타 회장은 1937년 12월28일 인도 뭄바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2년 미국 코넬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해 증조부가 창업한 타타그룹에 입사했다. 1971년 국영 라디오전기회사 이사로 임명된 뒤 1981년 타타산업의 회장을 거쳐 1991년 타타그룹 지주회사인 타타선즈 회장에 올랐다.
그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회사 체질 개선에 나섰다. 가장 강조한 분야는 자동차였다. 시멘트, 섬유 등 경쟁력이 떨어지던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하고 자동차 사업에 주력했다. ‘인도 자동차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목표 아래 승용차 시장 진출을 결정했다. 그동안 트럭밖에 만들지 않았던 타타로선 큰 모험이었다. 회사 수익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첫 소형 승용차인 ‘인디카’를 1998년 출시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생산량의 절반도 팔지 못해 1998~1999년 막대한 적자를 냈다.
승용차 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구조조정을 선택했다. 종업원 수를 40%나 감원하고 부품 하청업체도 절반 수준인 600여개로 줄였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인디카’와 2002년 선보인 중형차 ‘인디고’ 등이 인도 중소형차 시장에서 점유율 25%가량을 차지하며 마루티자동차와 현대자동차에 이어 3위로 도약했다.
자동차 외에도 적극적인 M&A로 회사를 키워나갔다. 2006년 10월에는 500만t 생산능력을 가진 타타스틸이 그보다 4배 큰 규모의 철강회사 코러스를 인수했다. 2008년 6월에는 영국의 고급자동차 업체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사들이며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가난한 인도인을 위한 사업
사업 규모가 커졌지만 국민들을 위한다는 경영철학은 바뀌지 않았다. 인도 기업들 사이에는 구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국내 소비자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하지만 타타 회장은 인도 소비자들의 저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인도인에게 안전하고 저렴한 승용차를 공급하고 싶었다. 인도에서는 이륜차나 스쿠터 하나에 모든 가족이 타고 이동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위험한 모습을 보고 안전하고 편안한 이동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소형 자동차에 맞는 엔진과 내·외장재를 찾는 데만 3년이 넘게 걸렸다. 2000년대 초부터 새로운 ‘국민차’를 만들겠다던 꿈은 2009년에야 비로소 실현됐다. 2009년 1월 선보인 250만원짜리 초저가 자동차 ‘나노(Nano)’가 그 결과다. 500명이 넘는 인원이 이 프로젝트에 10년 가까이 매달렸다. 나노는 출시 한 달 만에 4만대가 팔렸다. 차를 사기 위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타타그룹은 같은 해 12월 세계 최저가(2만5000원) 정수기 ‘스와처’를 내놨다. 스와처는 힌두어로 ‘깨끗하다’는 뜻이다. 타타 회장은 “싼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인도에서는 시골지역 거주자 가운데 약 75%가 정수된 물을 마시지 못해 매년 40만명의 어린이들이 물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다. 타타그룹은 2014년까지 300만가정에 안전한 식수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00만원도 안 되는 초저가 집 ‘나노 하우스’를 만들어 수억명의 빈곤층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도 제공했다. 나노 하우스는 지붕과 문, 창문 등을 포함한 조립식 주택이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벽과 인테리어는 코코넛 열매에서 추출한 섬유인 코이어와 황마를 사용했다. 나노 하우스의 성장 가능성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글로벌 회계법인 언스트앤 영에 따르면 인도 전역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선 2600만채 이상의 주택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타타 회장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경영은 직원들에게도 적용된다. 2008년 인도 금융의 중심지인 뭄바이에서 대규모 동시 다발 테러가 일어나면서 타타그룹 계열의 5성급 호텔인 타지마할호텔이 테러범의 표적이 됐다. 직원 49명을 포함한 300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재산 피해와 함께 이미지에도 타격을 받아 직원들의 이탈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타타 회장은 파격적인 직원 보상책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사망한 시점부터 은퇴 연령까지의 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직원의 나이가 30세였다면 정년인 60세까지의 30년치 임금을 주기로 했다. 유자녀들의 교육비도 국내외 상관없이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최고경영자(CEO)의 책임 있는 행동은 남은 직원과 인도 사회에 감동을 줬다.
신뢰를 바탕으로 그룹을 경영한 그가 CEO로서 이룬 성과도 눈에 띈다. 그가 취임하던 1991년 23억달러였던 타타그룹의 매출은 2011년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순익은 51배나 급증했다. 덩치뿐 아니라 내실도 제대로 다진 것이다. 2011년 말 기준 그룹 시가총액은 1991년에 비해 33배가 늘어났다. 같은 기간 인도 뭄바이 주가지수는 약 8배 증가에 그쳤다. 그룹 수익구조도 완전히 바뀌었다. 타타그룹은 1991년 매출의 5%만을 해외에서 올렸지만, 2011년에는 매출의 60%를 해외에서 거두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타타 회장은 지난해 말 그룹 지주회사인 타타선스의 시루스 미스트리 부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렀다. 타타선스 지분 66%를 보유한 타타자선재단 회장은 그대로 맡아 회사 의사 결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이런 성공 뒤에는 20여년 동안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타타그룹을 성장시킨 라탄 타타 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가 강조하는 기업철학은 ‘더 많은 국민이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하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과 동시에 어렵게 생활하는 인도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인도 최대 기업의 회장이면서도 작은 아파트에 살고, 소형차를 모는 검소한 생활로 인도 국민에게 높은 신망을 얻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08년 그를 ‘가장 존경받는 리더’로 선정하기도 했다.
○적극적 인수·합병으로 몸집 불려
타타 회장은 1937년 12월28일 인도 뭄바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2년 미국 코넬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해 증조부가 창업한 타타그룹에 입사했다. 1971년 국영 라디오전기회사 이사로 임명된 뒤 1981년 타타산업의 회장을 거쳐 1991년 타타그룹 지주회사인 타타선즈 회장에 올랐다.
그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회사 체질 개선에 나섰다. 가장 강조한 분야는 자동차였다. 시멘트, 섬유 등 경쟁력이 떨어지던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하고 자동차 사업에 주력했다. ‘인도 자동차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목표 아래 승용차 시장 진출을 결정했다. 그동안 트럭밖에 만들지 않았던 타타로선 큰 모험이었다. 회사 수익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첫 소형 승용차인 ‘인디카’를 1998년 출시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생산량의 절반도 팔지 못해 1998~1999년 막대한 적자를 냈다.
승용차 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구조조정을 선택했다. 종업원 수를 40%나 감원하고 부품 하청업체도 절반 수준인 600여개로 줄였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인디카’와 2002년 선보인 중형차 ‘인디고’ 등이 인도 중소형차 시장에서 점유율 25%가량을 차지하며 마루티자동차와 현대자동차에 이어 3위로 도약했다.
자동차 외에도 적극적인 M&A로 회사를 키워나갔다. 2006년 10월에는 500만t 생산능력을 가진 타타스틸이 그보다 4배 큰 규모의 철강회사 코러스를 인수했다. 2008년 6월에는 영국의 고급자동차 업체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사들이며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가난한 인도인을 위한 사업
사업 규모가 커졌지만 국민들을 위한다는 경영철학은 바뀌지 않았다. 인도 기업들 사이에는 구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국내 소비자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하지만 타타 회장은 인도 소비자들의 저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인도인에게 안전하고 저렴한 승용차를 공급하고 싶었다. 인도에서는 이륜차나 스쿠터 하나에 모든 가족이 타고 이동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위험한 모습을 보고 안전하고 편안한 이동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소형 자동차에 맞는 엔진과 내·외장재를 찾는 데만 3년이 넘게 걸렸다. 2000년대 초부터 새로운 ‘국민차’를 만들겠다던 꿈은 2009년에야 비로소 실현됐다. 2009년 1월 선보인 250만원짜리 초저가 자동차 ‘나노(Nano)’가 그 결과다. 500명이 넘는 인원이 이 프로젝트에 10년 가까이 매달렸다. 나노는 출시 한 달 만에 4만대가 팔렸다. 차를 사기 위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타타그룹은 같은 해 12월 세계 최저가(2만5000원) 정수기 ‘스와처’를 내놨다. 스와처는 힌두어로 ‘깨끗하다’는 뜻이다. 타타 회장은 “싼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인도에서는 시골지역 거주자 가운데 약 75%가 정수된 물을 마시지 못해 매년 40만명의 어린이들이 물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다. 타타그룹은 2014년까지 300만가정에 안전한 식수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00만원도 안 되는 초저가 집 ‘나노 하우스’를 만들어 수억명의 빈곤층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도 제공했다. 나노 하우스는 지붕과 문, 창문 등을 포함한 조립식 주택이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벽과 인테리어는 코코넛 열매에서 추출한 섬유인 코이어와 황마를 사용했다. 나노 하우스의 성장 가능성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글로벌 회계법인 언스트앤 영에 따르면 인도 전역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선 2600만채 이상의 주택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타타 회장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경영은 직원들에게도 적용된다. 2008년 인도 금융의 중심지인 뭄바이에서 대규모 동시 다발 테러가 일어나면서 타타그룹 계열의 5성급 호텔인 타지마할호텔이 테러범의 표적이 됐다. 직원 49명을 포함한 300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재산 피해와 함께 이미지에도 타격을 받아 직원들의 이탈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타타 회장은 파격적인 직원 보상책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사망한 시점부터 은퇴 연령까지의 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직원의 나이가 30세였다면 정년인 60세까지의 30년치 임금을 주기로 했다. 유자녀들의 교육비도 국내외 상관없이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최고경영자(CEO)의 책임 있는 행동은 남은 직원과 인도 사회에 감동을 줬다.
신뢰를 바탕으로 그룹을 경영한 그가 CEO로서 이룬 성과도 눈에 띈다. 그가 취임하던 1991년 23억달러였던 타타그룹의 매출은 2011년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순익은 51배나 급증했다. 덩치뿐 아니라 내실도 제대로 다진 것이다. 2011년 말 기준 그룹 시가총액은 1991년에 비해 33배가 늘어났다. 같은 기간 인도 뭄바이 주가지수는 약 8배 증가에 그쳤다. 그룹 수익구조도 완전히 바뀌었다. 타타그룹은 1991년 매출의 5%만을 해외에서 올렸지만, 2011년에는 매출의 60%를 해외에서 거두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타타 회장은 지난해 말 그룹 지주회사인 타타선스의 시루스 미스트리 부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렀다. 타타선스 지분 66%를 보유한 타타자선재단 회장은 그대로 맡아 회사 의사 결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