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북쪽 먼바다로부터 하늬바람이 불어오면 바다가 크게 일렁이죠. 맵찬 칼바람에 살점을 깎인 팽나무가 검은 가지로 버티던 풍경들도 마음을 울립니다. 돌팍에 얽히고설킨 덩굴, 돌담 밑의 수선화, 청보리 싹, 해변의 노란 유채꽃 등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질감에 매일 황홀하죠.”

1992년 서울 창신여고 교사 생활을 접고 22년째 고향 제주시 인근 귀덕리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서양화가 강요배(61)의 제주 예찬론이다.

오는 27일부터 내달 21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화랑에서 5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그는 “제주의 삶이 곧 내 삶이 됐다”며 “유년기 몸과 마음의 세포에 각인된 매운 바람 맛이 강한 인력으로 나를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화가는 그동안 고향 제주의 자연을 서정적인 붓질로 되살려냈다. 민족미술인협회장, 탐라미술협회 대표를 지냈고 민족예술상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제주를 ‘우주의 배꼽’으로 생각하며 화업을 이어가고 있다”며 “슬픈 역사(4·3사건)와 애환이 있어서인지 유난히 고향을 타는 것 같다”고 했다.

“대학 시절과 군 복무 때까지 20여년간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나 제주를 그리워하며 한라산을 떠올렸죠. 그러면 뭔가 위안이 되고 편안하거든요. 제가 제주를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낙향 후 10년 가까이 제주에 대해 다시 공부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제주를 화면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서다.

“제주의 지리, 풍경, 역사 등을 탐구하며 감성을 탐색했죠. 제주 풍토는 물론 사람들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과 겸손한 마음으로 붓질하고 싶었거든요. 풍경과 만나 느끼는 소리와 냄새는 제주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제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제주의 질감을 ‘묵직한 화려함’으로 풀어낸 풍경화와 정물화를 비롯해 추상화 40여점, 드로잉 10점 등을 내놓는다.

“지금은 지우고 형상을 조금씩 버려가는 편입니다. 그래야 거대한 파도와 출렁이는 물빛이 살아나더군요. 제 그림의 핵심은 ‘없다’에 있어요. 사람의 이미지를 화면에서 제거하는 것도 저와 관람객이 그림 속이 아니라 그림 앞에 서 있기 때문이죠.”

대상 자체보다 ‘대상과 관람객이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관람객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그림은 소통에 실패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의 다양한 제주 풍경에 흙 내음과 풀 내음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까닭도 마찬가지. 칼바람이 부는 백록담, 일렁이는 한라산의 영기, 빛이 떨어져 아른거리는 바다, 막걸리를 마시며 어루만지는 늙은 호박, 돌담밑에 고즈넉하게 핀 용설란, 붉은빛 칸나, 노란 꽃등불, 물 실은 마파람, 구름장 등 황홀한 풍경들이 그의 화폭에서 ‘붓춤’을 추는 듯하다.

그는 “앞으로의 20년 작업은 미학의 근본에 접근하고 싶다”고 했다. 가슴 아픈 역사의 무게가 실린 고향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조금 덜어낸 것일까. “그린다는 게 곧 마음의 공부죠. 왁자지껄한 공간에서 들리는 큰 소리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삶과 우주, 죽음 등 조용한 서정을 화면에 옮겨보고 싶어요.” (02)720-152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