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대를 이어 일자리를 보장한 현대자동차 단체협약 조항을 무효라고 판결했다. 유족에 대한 고용보장을 골자로 하는 노사의 단협 조항이 법적 효력이 있는지를 다룬 첫 판결이어서 정규직 노조의 세습 채용 요구에 제동이 걸릴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자리 대물림 단협 조항은 무효”

울산지방법원 제3민사부(재판장 도진기)는 현대차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뒤 2011년 업무상 재해(폐암)로 사망한 황모씨의 유족이 “단협 96조에 따라 황모씨의 자녀를 특별채용하라”며 현대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지난 8일 원고 패소 판결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부는 “근로자가 업무상 사망한 경우 유족의 생계보장은 금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라며 “결격사유가 없는 한 유족의 채용을 확정하도록 단체협약을 통해 제도화하는 방식은 사실상 일자리를 물려주는 결과를 낳아 다수의 취업 희망자를 좌절케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항에 대해선 노사가 합의하더라도 법률상 무효며 준수 의무 등 구속력은 부여되지 않는다”면서 “기업 경영과 인사에 관한 사항은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단체협약 96조는 사용자의 인사권에 관한 약정으로 무효면서, 사회질서에 반하여 민법 제103조에 따라 무효”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유족보상을 규정한 단협 97조에 따라 위로금을 지급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56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금속사업장 단협 대부분 비슷

이번 판결로 조합원 자녀 우선 채용 조항을 담은 단협을 둔 기업체 노사가 단협을 재조율하는 등 영향을 받을지 주목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업무상 재해자에 대한 배려가 제일 설득력이 있을 텐데 이를 무효화했다면 다른 조항은 말할 것도 없다”며 “판결대로 판단하면 우선 채용 관련 조항들은 100% 무효”라고 해석했다.

현대차 단협은 23조에도 ‘자녀 우선 채용’ 조항을 두고 있다. 23조는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직계자녀 1인에 한해 채용 규정상 적합한 경우 인사원칙에 따른 동일 조건에서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노조가 있는 대기업 사업장은 사정이 비슷한 곳이 많다. 기아자동차 단협 27조는 업무상 재해 사망자, 정년퇴직자,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GM, 현대중공업 등 단협에도 비슷한 조항이 있다. 시민단체 좋은기업센터에 따르면 2011년 현재 국내 200대 기업(매출 기준) 중 노조가 있는 157곳의 32.5%인 51곳 단협에 우선 채용 조항이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금속노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업장의 단협에는 대부분 자녀나 배우자에 대한 우선 채용 조항이 있다”고 설명했다.

울산지법의 판결을 일반화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이병한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가장이 업무상 재해를 당해 생계가 막막해진 가족을 배려하는 것이 왜 사회 상규에 반하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우선 채용 조항 전반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이라고 말하기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양병훈/울산=하인식 기자 hun@hankyung.com


■ 현대차 단체협약 96조

회사는 조합원이 업무상 사망하거나 6급 이상의 장해로 퇴직할 때 직계가족 또는 배우자 중 1인에 대해 결격사유가 없는 한 요청일로부터 6개월 이내 특별채용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