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6·25가 대한민국 기적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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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직후 남한은 거대한 용광로
北의 지식·자산 계층 대거 越南
지력 공백 직면한 북한은 자멸로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北의 지식·자산 계층 대거 越南
지력 공백 직면한 북한은 자멸로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대한민국의 발전은 세계사적이어서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다. 좌익들은 대한민국의 성취를 폄훼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투입해왔다. 새로 쓰여진 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집요한 시비도 그런 허망한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공 원인과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기적은 그것을 기적으로 인지하는 그룹 사이에서도 해석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까.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심과 일본인에 대한 경쟁심이라고 말한다면 박정희 개발연대의 심리적 측면에 주목한 주장이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 그룹은 일본인이 해낸 성취라면 한국인도 당연히 해낼 수 있다는 강력한 경쟁 심리를 갖고 있었고 이는 기업가였던 정주영과 이병철에게서 더욱 강했다. 미국의 원호가 주효했다는 주장은 미국의 원조와 비호를 받았던 나라가 한국만이 아니었음을 감안한다면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대한민국 발전의 동력 혹은 계기를 해방과 6·25전쟁에서 찾아보자는 일부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강한 확신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미증유의 6·25전쟁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전 국토에 걸친 생산시설의 파괴를 비롯해 필설로 다하지 못하는 전쟁 피해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생생한 터다. 그러나 종전 60주년을 맞아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도 되었을 것이다. 6·25가 대한민국 발전의 동력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6·25전쟁을 계기로, 아니 분단을 계기로 남과 북 사이에 거대한 인구 이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 지역에서 남한으로 피란오거나 석방되거나 이주한 인구의 숫자에 대해서는 최대 600만명이라는 설에서부터 적게는 50여만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이는 좌익 학자들조차 인정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에 반해 월북 인구의 숫자는 10만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인 추정이다. 10 대 1 정도의 비율로 일방적인 이동이 있었다는 거다.
더구나 월남한 대부분은 지식계급이거나 자산계층이었다. 보수 기독교단의 중추도 북한 출신이었고 이들을 배려한 탓에 극히 최근까지 국무총리의 상당수는 북한 출신으로 임명돼왔다. 정주영을 비롯한 기업인들에도 북한 출신이 많았고 정계는 물론 박정희 군사혁명 그룹에도 함경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개발연대 시기에 민주화 운동그룹에조차 상당수가 북한 출신이었다. 이들은 근대적 인간들이었고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자산계급이었다. 거대한 민족이동의 흐름을 타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시장경제형 인간들은 부산 국제시장의 상권을 장악한 것을 비롯해 남한 사회 내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적극적으로 자유 대한민국의 시장화, 근대화에 동참했다.
그러나 북한으로 올라갔던 소수의 사회주의형 월북자들은 박헌영이 미국 간첩으로 몰려 숙청된 것을 필두로 거의 대부분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북한의 순안공항과 평양지하철에는 집단으로 매장당한 수만명 월북자들의 시신이 깔려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비극적 결과는 북한 사회 내부의 철저한 ‘지력의 고갈’이었다. 근대적 지식을 가진 사람도, 재산을 가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북한은 완벽하게, 그리고 서서히 해방 이전의 상태, 다시 말해 주자학적 질서가 온존하는 봉건왕조로 퇴행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거대한 용광로였고 지식사회였고 경쟁사회였다. 그것은 마치 1,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으로부터 거대한 이민의 물결이 쏟아져 들어왔던 미국적 현상이, 규모는 작았지만 한국에서도 나타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자유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지력이 바닥난 봉건사회와 인재가 넘쳐났던 대한민국의 대결이었다. 포성이 멎은 지 60년의 결과를 지금 우리는 확실하게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지력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자유 아닌 국가 개입이 유행병이 되고 만다면 대한민국의 갈 길도 뻔하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심과 일본인에 대한 경쟁심이라고 말한다면 박정희 개발연대의 심리적 측면에 주목한 주장이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 그룹은 일본인이 해낸 성취라면 한국인도 당연히 해낼 수 있다는 강력한 경쟁 심리를 갖고 있었고 이는 기업가였던 정주영과 이병철에게서 더욱 강했다. 미국의 원호가 주효했다는 주장은 미국의 원조와 비호를 받았던 나라가 한국만이 아니었음을 감안한다면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대한민국 발전의 동력 혹은 계기를 해방과 6·25전쟁에서 찾아보자는 일부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강한 확신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미증유의 6·25전쟁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전 국토에 걸친 생산시설의 파괴를 비롯해 필설로 다하지 못하는 전쟁 피해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생생한 터다. 그러나 종전 60주년을 맞아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도 되었을 것이다. 6·25가 대한민국 발전의 동력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6·25전쟁을 계기로, 아니 분단을 계기로 남과 북 사이에 거대한 인구 이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 지역에서 남한으로 피란오거나 석방되거나 이주한 인구의 숫자에 대해서는 최대 600만명이라는 설에서부터 적게는 50여만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이는 좌익 학자들조차 인정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에 반해 월북 인구의 숫자는 10만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인 추정이다. 10 대 1 정도의 비율로 일방적인 이동이 있었다는 거다.
더구나 월남한 대부분은 지식계급이거나 자산계층이었다. 보수 기독교단의 중추도 북한 출신이었고 이들을 배려한 탓에 극히 최근까지 국무총리의 상당수는 북한 출신으로 임명돼왔다. 정주영을 비롯한 기업인들에도 북한 출신이 많았고 정계는 물론 박정희 군사혁명 그룹에도 함경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개발연대 시기에 민주화 운동그룹에조차 상당수가 북한 출신이었다. 이들은 근대적 인간들이었고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자산계급이었다. 거대한 민족이동의 흐름을 타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시장경제형 인간들은 부산 국제시장의 상권을 장악한 것을 비롯해 남한 사회 내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적극적으로 자유 대한민국의 시장화, 근대화에 동참했다.
그러나 북한으로 올라갔던 소수의 사회주의형 월북자들은 박헌영이 미국 간첩으로 몰려 숙청된 것을 필두로 거의 대부분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북한의 순안공항과 평양지하철에는 집단으로 매장당한 수만명 월북자들의 시신이 깔려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비극적 결과는 북한 사회 내부의 철저한 ‘지력의 고갈’이었다. 근대적 지식을 가진 사람도, 재산을 가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북한은 완벽하게, 그리고 서서히 해방 이전의 상태, 다시 말해 주자학적 질서가 온존하는 봉건왕조로 퇴행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거대한 용광로였고 지식사회였고 경쟁사회였다. 그것은 마치 1,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으로부터 거대한 이민의 물결이 쏟아져 들어왔던 미국적 현상이, 규모는 작았지만 한국에서도 나타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자유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지력이 바닥난 봉건사회와 인재가 넘쳐났던 대한민국의 대결이었다. 포성이 멎은 지 60년의 결과를 지금 우리는 확실하게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지력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자유 아닌 국가 개입이 유행병이 되고 만다면 대한민국의 갈 길도 뻔하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