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버냉키, 존 로, 금융사기
“중앙은행이 없었던 시절이 차라리 좋았다”는 앨런 그린스펀의 말은 의외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을 지냈다. 돈을 풀어댔던 재임 중 오류를 사면받겠다는 언어의 레토릭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린스펀의 이 독백은 출구전략에 대한 대중의 공포 속에서 곧바로 잊혀졌다. 소위 비(非)전통적 통화정책(unconventional monetary policy)으로부터의 출구전략이 세계 금융시장에 예고된 충격파를 던지고 있는 중이다.

Fed는 2008년 이후 제1차 양적완화에서 모두 1조7500억달러의 ‘공공부채 증서’를 사들였다. 2차에서는 장기국채 6000억달러를 샀다. 3차에서는 2012년 9월 이후 매달 850억달러의 모기지증권과 장기국채를 매입하고 있다. 그렇게 3조달러의 공공부채 증서를 사들였다. 명분은 시장 안정이지만 기실은 지표를 조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010년이 되자 금리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제로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이 2.5%를 넘어서지 않는 한, 실업률이 6.5%에 도달할 때까지 국채를 계속 사들인다는 정책을 내놨다. 이것이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골자다. 이제 자산매입을 서서히 줄인 다음 내년 중반에는 완전히 포기한다는 시간표가 나왔다. 인플레 실업률 등 조건에 변화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퇴임을 앞둔 벤 버냉키 Fed 의장이 어떻든 진흙탕으로부터 발을 빼고 싶었던 때문일 것이다.

장단기 국채 교환을 의미하는 소위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등 생소한 통화정책은 과연 월가의 조어법만큼이나 ‘비전통적’일까. 트위스트는 일종의 지표금리 조작이었지만 월가는 한동안 꿀먹은 벙어리였다. 돈을 풀어 거품을 만들고 그 거품으로 경제를 살린다는 허구의 논리는 사실 중앙은행의 오랜 전통이요 뿌리다. 반대급부가 문제였을 뿐 부채증서 매입은 중앙은행의 감추고 싶은 전력(前歷)일 뿐이다. 중앙은행의 원조라고 알려진 스웨덴의 릭스방크(1668년)만 하더라도 왕실 부채를 매입해주는 대가로 시뇨리지(화폐발행차익)를 보장받은 특허 상업은행이었고 영란은행(1694년)도 국가의 전쟁부채를 떠안는 것으로 비로소 설립허가를 받았다. 1913년 미국서 Fed가 탄생할 때까지 유럽 중앙은행들은 이 사업모델을 따랐다.

완벽한 사례는 증권 사기꾼으로도 유명한 ‘잘생긴 존 로’다. 로는 스코틀랜드 금세공은행업자의 아들이었다. 금세공은행업이라니? 그렇다. 유통화폐는 원래 금 보관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 보관증은 언제나 진짜 금 보유량보다 많이 발행된다는 것을 알았던 로는 아예 금 없이 주식이나 채권증서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돈을 풀고 경제를 돌아가게 하자는 담대한 주장을 폈다. 그야말로 케인스의 아버지요, 중앙은행 이론의 창설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세워진 은행이 프랑스 르와얄은행이며 그것의 쌍둥이 회사로 세워진 것이 그 유명한 미시시피 주식회사였다.

로는 국가부채를 매입하고 이를 자산으로 미시시피 주식을 발행해 대중에게 매각하는 과정에서 특권을 방패막이 삼아 본격적으로 거품을 만들어냈다. 거품은 주당 500리브르짜리 주식을 1만8000리브르까지 밀어 올렸지만 결국 97%나 폭락하는 파국을 맞았다. 이것이 1720년대를 지배했던 전대미문의 증권사기 사건 즉, 미시시피 거품 사건의 전말이다. 여기서 삽화 한토막…. 거품이 만들어지고 꺼지는 와중에 물리학자 뉴턴은 재산을 잃었고 음악가 헨델은 큰 돈을 벌어 음악원을 지었다고 한다. 삶은 종종 우연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남해 거품’은 동시대 영국서 일어난 같은 사건이다. 이들 사건에는 증권 사기라는 오명이 붙어 있지만 실은 중앙은행의 실패요, 국가 금융 사기의 종착역이었다.

버냉키의 양적완화도 로와 다를 것이 없다. ‘비전통’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의 수법이다.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독립적 중앙은행이었던 시기는 20세기 일부의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케인스가 타락시킨 것을 버냉키가 무너뜨렸다는 역사적 기록이 쓰여질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그렇게 종종 수(數)의 마술에 현혹된다. 차라리 독점 중앙은행 제도를 폐지하고 자유경쟁 화폐로 전환하는 것이 국가 경제 안정에는 더 좋을지 모르겠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