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누가 인문학을 말씀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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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편향성 은폐하는 반쪽 인문학
시장정의론 세웠던 칸트 읽어봤나…인성교육론도 유교이상론의 흔적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시장정의론 세웠던 칸트 읽어봤나…인성교육론도 유교이상론의 흔적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박근혜 대통령은 논설실장들과의 오찬에서도 문사철(文史哲)을 강조했다. 중국 총통 시진핑 씨와의 정상회담에서는 ‘인문유대’에 합의하기도 했다. ‘총통 씨’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총통 박근혜 여사’라는 중국 측 어법을 따랐을 뿐이다. 한국 외교부는 ‘인문유대’는 한국 측 요구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중국의 인문관, 즉 중화주의에 동의한다는 뜻인 줄 알고 깜짝 놀라지 않았던가 말이다.
휴가철 읽을 만한 책에는 으레 인문학 서적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요즈음이다. 그 다음이 처세술이다. 대학 AMP 과정에 문학과 예술이 빠지면 장사가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를 인문학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따지고 보면 싸구려 인문학의 전성기다. 급기야 대학교수들의 떼거리즘에 밀려 인문학은 대학평가에서도 예외로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출판계에서는 인문 분야라야 1만권이라도 팔 수 있다. 없는 이야기를 잘도 만들어내는 일부 작가들이 정치적 영향력은 더 크다는 식이다.
인문학을 강조하는 어법의 백미는 강남 좌파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문주의자로 포장한다. 좌파는 왜 좌파로 불리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소위 강남 인문주의자들-그렇게 불러달라니까-은 스티브 잡스가 소크라테스와 대화할 수 있다면 모든 재산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는 따위의 일화만 수집한다. 그러나 정작 소크라테스를 읽어본 적이 없다. 민중들의 광적인 인민재판 끝에 독배를 마셔야 했던 소크라테스를 읽었다면 이토록 저질인 대중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들은 종종 인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위기 아닌 빈곤이다. 꽤 유명한 철학 교수들조차 국제 좌파인 마이클 샌델과 노암 촘스키를 팔아 연명할 정도 아닌가.
동양학은 더욱 그렇다.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무례하게도 ‘멀리 보려면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훈계조의 족자를 내걸었던 때도 그랬다. 사이비들은 오히려 상찬에 바빴다. 일부이긴 하지만 동양학은 학(學)이라기보다는 처세의 술(術)이거나, 답습의 습(習)으로, 혹은 석(釋)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나관중의 삼국지이거나 손자병법의 처세술이다. 중국은 자유주의 시민혁명을 거친 한국보다 몇 수 아래다. 여전히 개발연대요, 일당독재다. 그런데 새삼 중국 열풍이다. 은폐된 반미·반일 정서일 수도 있지만 오랜 사대근성일 수도 있다.
마이클 샌델만 해도 그렇다. 정의 원칙은 시장규칙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나 ‘정의란 무엇인가’의 골자다. 자칫 허위의식이 되기 쉬운 것이 바로 척박한 사상적 토양이 만들어내는 좌편향성이다. 시장은 불의(不義)하기 때문에 정의 원칙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얄팍한 논리와 천박한 사명감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정의론의 존 롤스를 면도날처럼 발라냈던 로버트 노직의 치열한 ‘시장 정의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시장원리는 재벌편이며 우리는 고상한 인문주의자라며 방정을 떤다. 얄팍한 반시장주의를 인문학이라는 단어로 위장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인문학의 천박성을 드러낸다. 더구나 시장경제가 만들어내는 정의로운 체제와 그것이 확산시키는 평화와 평등의 질서에 대해 실로 진지한 논문을 썼던 사람이 바로 도덕주의 철학자 칸트였다는 사실에는 입을 다문다. 아니 아예 지식 범위 밖이다.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최근의 주장들도 실은 요란한 빈수레다. 교육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유교적 발상이지 근대적 법치의 원리가 아니다. 학교 안 인성교육은 기껏해야 학생들조차 비웃는 OX 답안지에만 존재한다. 건전한 직업인의 육성이야말로 성숙한 민주주의의 버팀목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가능성은 제로다. 인성교육이 민주시민을 위한 교육일 수는 없다. 인문학 열풍은 유교적 질서를 염원하는 가짜 지식층의 주자학적 본능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경제민주화도 상인들의 이윤 행위를 범죄시하는 주자학적 선동이다. 그렇게 가짜 인문학이 넘쳐난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머리보다 손과 발이 부지런해야 한다. 인문정신이 아니라 무실역행하는 과학정신이 필요하다. 그들은 어떤 인문학을 말하는지.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휴가철 읽을 만한 책에는 으레 인문학 서적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요즈음이다. 그 다음이 처세술이다. 대학 AMP 과정에 문학과 예술이 빠지면 장사가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를 인문학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따지고 보면 싸구려 인문학의 전성기다. 급기야 대학교수들의 떼거리즘에 밀려 인문학은 대학평가에서도 예외로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출판계에서는 인문 분야라야 1만권이라도 팔 수 있다. 없는 이야기를 잘도 만들어내는 일부 작가들이 정치적 영향력은 더 크다는 식이다.
인문학을 강조하는 어법의 백미는 강남 좌파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문주의자로 포장한다. 좌파는 왜 좌파로 불리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소위 강남 인문주의자들-그렇게 불러달라니까-은 스티브 잡스가 소크라테스와 대화할 수 있다면 모든 재산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는 따위의 일화만 수집한다. 그러나 정작 소크라테스를 읽어본 적이 없다. 민중들의 광적인 인민재판 끝에 독배를 마셔야 했던 소크라테스를 읽었다면 이토록 저질인 대중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들은 종종 인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위기 아닌 빈곤이다. 꽤 유명한 철학 교수들조차 국제 좌파인 마이클 샌델과 노암 촘스키를 팔아 연명할 정도 아닌가.
동양학은 더욱 그렇다.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무례하게도 ‘멀리 보려면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훈계조의 족자를 내걸었던 때도 그랬다. 사이비들은 오히려 상찬에 바빴다. 일부이긴 하지만 동양학은 학(學)이라기보다는 처세의 술(術)이거나, 답습의 습(習)으로, 혹은 석(釋)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나관중의 삼국지이거나 손자병법의 처세술이다. 중국은 자유주의 시민혁명을 거친 한국보다 몇 수 아래다. 여전히 개발연대요, 일당독재다. 그런데 새삼 중국 열풍이다. 은폐된 반미·반일 정서일 수도 있지만 오랜 사대근성일 수도 있다.
마이클 샌델만 해도 그렇다. 정의 원칙은 시장규칙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나 ‘정의란 무엇인가’의 골자다. 자칫 허위의식이 되기 쉬운 것이 바로 척박한 사상적 토양이 만들어내는 좌편향성이다. 시장은 불의(不義)하기 때문에 정의 원칙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얄팍한 논리와 천박한 사명감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정의론의 존 롤스를 면도날처럼 발라냈던 로버트 노직의 치열한 ‘시장 정의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시장원리는 재벌편이며 우리는 고상한 인문주의자라며 방정을 떤다. 얄팍한 반시장주의를 인문학이라는 단어로 위장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인문학의 천박성을 드러낸다. 더구나 시장경제가 만들어내는 정의로운 체제와 그것이 확산시키는 평화와 평등의 질서에 대해 실로 진지한 논문을 썼던 사람이 바로 도덕주의 철학자 칸트였다는 사실에는 입을 다문다. 아니 아예 지식 범위 밖이다.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최근의 주장들도 실은 요란한 빈수레다. 교육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유교적 발상이지 근대적 법치의 원리가 아니다. 학교 안 인성교육은 기껏해야 학생들조차 비웃는 OX 답안지에만 존재한다. 건전한 직업인의 육성이야말로 성숙한 민주주의의 버팀목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가능성은 제로다. 인성교육이 민주시민을 위한 교육일 수는 없다. 인문학 열풍은 유교적 질서를 염원하는 가짜 지식층의 주자학적 본능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경제민주화도 상인들의 이윤 행위를 범죄시하는 주자학적 선동이다. 그렇게 가짜 인문학이 넘쳐난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머리보다 손과 발이 부지런해야 한다. 인문정신이 아니라 무실역행하는 과학정신이 필요하다. 그들은 어떤 인문학을 말하는지.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