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아파트에 울고 웃고…부동산으로 벌이는 중산층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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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게임 / 박해천 지음 / 휴머니스트 / 322쪽 / 1만8000원
“따지고 보면 K씨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산시장의 움직임을 짐짓 모른 척하며 혼자서 성인군자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정치개혁의 열망이 자본소득의 욕망에 패배했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그는 ‘중산층 소비자’에서 ‘참여하는 시민’으로 깨어났지만, 집권 후반기에는 다시 ‘자산 투자자’로 깨어났다. 시세 차익을 추구하는 자산시장의 ‘플레이어’가 ‘시민’이라는 백일몽에서 깨어난 그가 새롭게 맡아야 할 배역이었다. 2007년, K씨는 자신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길 빌면서 유명 건설사들의 모델하우스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게임》의 2장에 등장하는 1955년생 베이비부머 K씨의 인생 단막이다. 2000년대 중반의 아파트 폭등을 경험하면서 정치적 시민에서 자산 투자자로 변해가는 그의 모습은 부동산 문제와 얽힌 한국 중산층의 행로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가 아닌 아파트가 계층을 결정했던 한국사회에서는 시민의식이 아니라 부동산의 흐름을 얼마나 잘 읽었느냐가 중산층 진입을 좌우했다.
이 책은 한국 부동산 경제에 관한 논픽션이 아니다. 부동산을 중심으로 쓴 사회비평적 픽션이다. 저자는 부동산, 특히 아파트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가상의 행위자를 신문, 논문, 소설 등 다양한 자료로 조직한 상황에 밀어넣은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관찰하는 서술 방식을 택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잘 만든 TV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부동산과 얽힌 각 세대의 문화 및 정치·사회적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책의 1장에서 그는 10년 주기로 되풀이되는 정치 격변, 경제 호황, 아파트 건설이라는 사건들 속에서 각 세대들이 아파트와 게임을 벌이는 과정을 살펴보고, 2장과 3장에서는 각각 1955년생과 1962년생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중산층의 갈림길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아파트 게임’마저 벌일 수 없게 된 미래 세대의 현실을 담았다.
K씨와 달리 아파트 게임의 본질을 잘 파악한 3장의 주인공을 보자. 1962년생인 그는 대학 때 이미 사회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혼자 세상을 헤쳐나갈 방법으로 부동산에 눈을 떴다. 1993년 봄 그는 운 좋게도 수도권 남쪽 신도시의 32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평당 분양가는 180만원대. 분양권이 당첨된 날 그의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중산층의 삶에 익숙해졌고,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 덕분에 외환위기의 구조조정도 피할 수 있었다.
구조조정의 한파가 지나자 그는 ‘바이 코리아’ 열풍을 타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목돈을 벌었고, 주가 상승이 곧 아파트값 상승으로 이어질 거라는 신문의 조언을 믿고 대지 지분이 큰 반포의 재건축 단지를 매입했다. 2008년 재건축된 단지의 평당 분양가는 3000만원대를 간단히 넘겼다. 그는 이제 정치와 거리를 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계층이 됐다. 그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이미 실현했기 때문에 구태여 정치적 대변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계층”이었고, 저출산으로 미래가 불투명한 한국 사회가 아닌 곳으로 아이를 유학 보낼 수 있는 계층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한국 부동산의 새로운 흐름은 방 한 칸을 상징하는 ‘큐브’다. 1960년대 대학가의 하숙집과 1970년대 공단 근처의 벌집, 1990년대부터 그 뒤를 이은 고시원까지. 저임금·저출산·고분양가가 일상화됨에 따라 집 대신 방에서 살아야 하는 미래 세대는 이제 아파트를 둘러싼 게임조차 벌일 수 없다. 저자는 ‘정치’가 저성장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고안해 내지 못한다면 세상은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값이 떨어져야 한다거나 올라야 한다는 당위적 관점, 혹은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현상을 담담히 짚는 것도 몰입도를 높이는 이 책의 장점이다. 책을 덮으면 환희와 절망을 좌우한 한국 부동산 역사에 씁쓸한 뒷맛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밀도 있는 내용을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디자인 연구가인 저자의 아파트에 관한 두 번째 저서다. “20세기 디자인의 역사는 사실상 중산층의 역사이고, 한국 중산층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아파트의 역사”라는 게 저자가 아파트 관련 책을 쓰게 된 계기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아파트 게임》의 2장에 등장하는 1955년생 베이비부머 K씨의 인생 단막이다. 2000년대 중반의 아파트 폭등을 경험하면서 정치적 시민에서 자산 투자자로 변해가는 그의 모습은 부동산 문제와 얽힌 한국 중산층의 행로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가 아닌 아파트가 계층을 결정했던 한국사회에서는 시민의식이 아니라 부동산의 흐름을 얼마나 잘 읽었느냐가 중산층 진입을 좌우했다.
이 책은 한국 부동산 경제에 관한 논픽션이 아니다. 부동산을 중심으로 쓴 사회비평적 픽션이다. 저자는 부동산, 특히 아파트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가상의 행위자를 신문, 논문, 소설 등 다양한 자료로 조직한 상황에 밀어넣은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관찰하는 서술 방식을 택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잘 만든 TV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부동산과 얽힌 각 세대의 문화 및 정치·사회적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책의 1장에서 그는 10년 주기로 되풀이되는 정치 격변, 경제 호황, 아파트 건설이라는 사건들 속에서 각 세대들이 아파트와 게임을 벌이는 과정을 살펴보고, 2장과 3장에서는 각각 1955년생과 1962년생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중산층의 갈림길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아파트 게임’마저 벌일 수 없게 된 미래 세대의 현실을 담았다.
K씨와 달리 아파트 게임의 본질을 잘 파악한 3장의 주인공을 보자. 1962년생인 그는 대학 때 이미 사회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혼자 세상을 헤쳐나갈 방법으로 부동산에 눈을 떴다. 1993년 봄 그는 운 좋게도 수도권 남쪽 신도시의 32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평당 분양가는 180만원대. 분양권이 당첨된 날 그의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중산층의 삶에 익숙해졌고,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 덕분에 외환위기의 구조조정도 피할 수 있었다.
구조조정의 한파가 지나자 그는 ‘바이 코리아’ 열풍을 타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목돈을 벌었고, 주가 상승이 곧 아파트값 상승으로 이어질 거라는 신문의 조언을 믿고 대지 지분이 큰 반포의 재건축 단지를 매입했다. 2008년 재건축된 단지의 평당 분양가는 3000만원대를 간단히 넘겼다. 그는 이제 정치와 거리를 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계층이 됐다. 그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이미 실현했기 때문에 구태여 정치적 대변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계층”이었고, 저출산으로 미래가 불투명한 한국 사회가 아닌 곳으로 아이를 유학 보낼 수 있는 계층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한국 부동산의 새로운 흐름은 방 한 칸을 상징하는 ‘큐브’다. 1960년대 대학가의 하숙집과 1970년대 공단 근처의 벌집, 1990년대부터 그 뒤를 이은 고시원까지. 저임금·저출산·고분양가가 일상화됨에 따라 집 대신 방에서 살아야 하는 미래 세대는 이제 아파트를 둘러싼 게임조차 벌일 수 없다. 저자는 ‘정치’가 저성장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고안해 내지 못한다면 세상은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집값이 떨어져야 한다거나 올라야 한다는 당위적 관점, 혹은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현상을 담담히 짚는 것도 몰입도를 높이는 이 책의 장점이다. 책을 덮으면 환희와 절망을 좌우한 한국 부동산 역사에 씁쓸한 뒷맛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밀도 있는 내용을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디자인 연구가인 저자의 아파트에 관한 두 번째 저서다. “20세기 디자인의 역사는 사실상 중산층의 역사이고, 한국 중산층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아파트의 역사”라는 게 저자가 아파트 관련 책을 쓰게 된 계기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