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성 기자의 '우리의 와인'] 와인 한병에 책보다 많은 철학이 담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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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 기자의 와인 칼럼 '우리의 와인' <1회>
"한 병의 와인에는 세상 어떤 책보다 더 많은 철학이 담겨있다."
'미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이 파스퇴르의 명언입니다. 그는 1850년대 저온살균법을 개발, 프랑스 와인산업에 일대 전기를 가져다줍니다. 와인 산화 및 부패를 막기 위해 개발한 기술이 저온살균법(파스퇴라이제이션)입니다.
파스퇴르가 와인에 담긴 철학이 이만큼이나 귀하다고 여긴 이유는 뭘까요?
와인 한병을 온전히 이해할 때 큰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와인을 만드는건 결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병 와인에 담긴 철학은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양조하는 사람의 철학과 같습니다. 와인이 동서고금을 뛰어넘어 사랑받는 이유는 와인만큼이나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흥미롭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마시는 모든 와인에는 포도 재배자와 양조자의 수만가지 선택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포도 품종 와인을 만들지, 어떤 지역에서 포도를 기를지, 물은 얼마만큼 줄지, 농약은 칠지 말지, 포도는 어떻게 으깰지, 어떤 효모를 쓸지, 발효는 어떤 통에서 할지, 오크·병 숙성은 얼마나 길게 할지 등등 무수합니다. 핵심은 밭 토양 성질과 기후적 테루아(Terroir)를 어떻게 포도에 새겨넣고, 그 포도를 발효·숙성할 때 테루아적 특성을 와인에 얼마만큼 녹여낼 수 있느냐가 양조자 저마다의 철학적 선택이며 최종 목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와인을 살 때 와인 양조자의 철학까지 함께 구매하고 즐기는 셈입니다. 명품에 장인(匠人)의 가치가 담겨있는 것처럼 고가의 와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오죽하면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고 사람의 능력을 치켜세웠을까요.
와인이, 그 와인을 만드는 사람의 철학 그 자체인 와이너리 한 곳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호주 최고 컬트 와인으로 불리는 '몰리두커' 입니다. 왼손잡이를 뜻하는 '몰리두커' 와인은 스파키 마르키스(남편)와 사라 마르키스 부부가 호주 애들레이드 남쪽, 맥라렌 베일(Mclaren vale)에서 담급니다.
카니발 오브 러브(Carnival of Love), 블루 아이드 보이(Blue Eyed Boy), 메이터 디(Maitre D), 더 바이올리니스트(The violinist), 투 레프트 핏(Two Left Feet), 기글 팟(Giggle Pot) 등. 상상력 가득한 라벨에 독특한 이름을 새긴 이들 와인에는 '사랑', '즐거움', 그리고 '가족'이라는 마르키스 부부의 인생 가치가 담겨있습니다. '카니발 오브 러브'. 사랑의 축제라는 이름이 말해주 듯 이 와인에는 서로 사랑하면서 인생을 즐기고픈 부부의 바람이 녹아있습니다. 한병(750ml)이 50만원인 이 와인은 호주 고급 쉬라 100%로 만들어집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95점(100점 만점·RP)을 받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죠.
'블루 아이드 보이'에는 눈이 유독 파란 아들, 루크(17)를 향한 애정을 담았습니다. 라벨에는 포도를 신나게 발로 으깨는 아들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국내 와인판매점에 '블루 아이드 보이'는 입고되면 며칠 안에 다 팔릴 정도로 인기입니다.
기글 팟(Giggle Pot)의 주인공은 딸 홀리(13)입니다. 지글지글 끓는 냄비처럼 홀리는 킥킥거리며(giggle) 잘 웃는 소녀라고 합니다. 카베르네 쇼비뇽(카쇼) 100%인 기글팟을 맛보면 카쇼 특유의 원초적 동물향과 함께 높은 산도, 화사한 과일향들의 균형미가 일품입니다.
웨이터 주임을 뜻하는 '메이터 디' 라벨에는 남편 스파키가 식당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 와인양조학교 학비를 대던 20대 시절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왼손잡이인 탓에 음식을 나르다 여기저기 부딪혀 넘어지던 옛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넣었죠. 카쇼100%로 만들어졌습니다. 맛을 보면 카쇼 와인 답게 묵직하긴 합니다만 좀 더 과일향이 화사하고 탄닌도 꽤 부드럽습니다. 웨이터 돈벌이는 '묵직하게' 힘들었지만 와인을 향한 꿈이 있기에 시절은 '화사했다'는 뜻일까요?
아내 사라의 취미는 바이올린 연주입니다. 그래서 몰리두커 유일의 화이트 와인의 이름은 사라가 바이올린 켜는 모습을 만화로 표현한 '더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특이하게 호주 토착 화이트 품종인 베르델로 100%로 만들어졌습니다. 맛을 보면 샤도네이류의 화사한 화이트가 아닙니다. 단맛은 없지만 독일 고가 리슬링 와인들처럼 특유의 페트롤륨 계열 향과 쌉싸름한 기름처럼 혀에 다가올만큼 독특합니다. 사라가 연주하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연주실력은 그닥 귀에 익숙하지 않는 엉뚱함이 있었나 봅니다.
스파키와 사라를 대표하는 '메이터 디'와 '더 바이올리니스트' 2010년 빈티지(생산년도)는 한쌍의 부부처럼 로버트 파커 90점을 나란히 받았습니다.
부부는 자신들이 만드는 모든 몰리두커 와인에 이처럼 '사랑', '즐거움', 그리고 '가족'을 녹였냅니다. 기자가 지난달 25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마르키스 부부를 국내 일간지 매체 중에서는 독점으로 만났을을 때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가족'들과 인생이라는 여행을 '즐기자'는게 부부의 인생 철학이더군요.
세계적 와인메이커 그리고 백만장자로 알려진 '부자' 부부입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나누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자신들은 그저 평범한 포도 농사꾼일 뿐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격식 따지지않고, 대화 내내 소탈했습니다.
스파키는 한병(750ml) 가격이 500만원을 넘는 미국 최고 컬트와인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을 만드는 하이디 배럿을 소개하면서 "성공하는 사람은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다"고 강조하더군요. 수백만원짜리 와인을 만드는 배럿도 와인 병입 때는 생산 라인에 서서 일일이 직접 담는다고 말입니다.
유쾌하게 인생을 즐기면서도, 와인 생산에만큼은 철저하게 기본을 강조하는 스파키-사라 부부를 보면서 이런 옛말이 떠올랐습니다.
'비범(非凡)도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
독자 여러분들도 몰리두커를 통해 스파키-사라 부부의 인생 철학을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p.s. [독점 인터뷰]호주 컬트와인 '몰리두커' 성공 원칙 "늘 사람을 높게 평가하세요" 도 함께 읽어보세요. 몰리두커와 스파키-사라 부부의 더 많은 와인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글, 사진=한경닷컴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 트위터 @mean_R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