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남겨진 빚
벌써 30년 전 일이지만 내겐 엊그제처럼 생각돼 잊혀지지 않는 미국 대학 교수님이 있다. 그 교수님에게 나는 크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1981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중 비교적 작은 캠퍼스에서 나는 유일한 한국 학생으로 유학을 시작했다. 여름학기 동안 세익스피어 강의를 한다기에 학점을 따둬야겠다는 생각으로 등록을 하고 나서, 곧바로 후회를 했다. 토론식 대학원 수업에서 내용을 따라가기 벅차고 영어도 서투르기 짝이 없어 ‘경청’으로만 일관하는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여름학기가 시작되던 첫날, 담당교수님는 나를 불러내어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교수회관 라운지로 데려가 커피 한 잔씩을 사서 테이블 위에 놓고 마주 앉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게 첫날 수업이 어땠는지 물었다.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이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어떻게 이해되는지 질문을 해왔다. 나는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얘기를 이어가다가 그것이 오롯이 또 하나의 수업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개인수업은 매일 한 시간씩 여름학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 나는 그 대화의 과정을 통해 문학감상은 물론 그 교수님이 보여준 세밀한 관심이 길고 험한 유학생활의 첫걸음을 든든하게 붙잡아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 마지막 날, 교수님은 “이 개인수업은 후일 당신이 교수가 되면 다른 학생에게 갚으면 된다”는 말로 내가 교수가 된 뒤 갚아야 할 빚으로 남겨주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졸업논문 작성을 앞두고 다시 그 교수님을 찾아갔으나 자신이 암 투병 중이라면서 다른 교수를 소개해줬다. 대신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과 나의 고군분투에 대한 연민이 남아서인지 두 번째 개인교습을 제안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여성은 결혼을 통해서만 신분 상승을 꾀할 수밖에 없다는 관습에 결연히 맞서는 여주인공 엘리자벳을 멀리 한국에서 온 여학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안타깝게도 그 교수님의 부고는 내가 박사과정을 위해 다른 대학으로 떠난 그해에 들려왔다. 미국의 작은 도시 대학캠퍼스에 고립되어 오직 책과 씨름해야 했던 나는, 어쩌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유학생활의 첫 단계에서 값진 선물을 받은 것이다. 두고두고 내 제자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며, 남겨야 할 유산이기도 하다.

황선혜 < 숙명여대 총장 hwangshp@s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