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바라바여, 바라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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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 행동 도덕적 파탄 상태
신앙자유 성속분리에 모두 위배
천주교는 정치 오염원 걷어내야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신앙자유 성속분리에 모두 위배
천주교는 정치 오염원 걷어내야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바라바를 살려주시오!’라고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군중은 외쳤다. 루카 복음은 바라바를 반란과 살인죄로 복역 중인 자라고 쓰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그를 무장폭력 노선을 따랐던 질로트(열심당)의 지도자로 본다. 빌라도는 거듭 예수냐 바라바냐를 물었지만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바라바!’라고 외쳤다. 예수는 그렇게 사제들의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카이사르의 것에 대한 논란 보다 비극적인 사건이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하는 이 장면이다. 유대인들, 아니 사람들은 그렇게 종종 예수를 버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유럽순방 중 베네딕토 교황을 만났던 일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교황은 한국 천주교 일각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정치편향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먼저 밝혔다고 한다. 어떤 관계자는 비슷한 내용의 교황청 서한이 한국 교구에 전달됐을 것이라는 언질도 준다. 한동안 잠잠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그들이 낡은 깃발을 다시 올렸다. 증오와 적개심으로 가득찬 정치언어로 성소와 제단을 능멸하는 것은 비신앙인조차 수용하기 어렵다.
베네딕토 전 교황은 교황청 교리성 장관 출신이다. 한때 가톨릭 개혁의 기수였던 노련한 호교론자다. 1983년의 한 연설에서 그는 해방신학은 정치와 사회분석을 신학으로 분칠한 오류라며 선을 그었다. 나중에 4명의 신부를 파문시킨 장본인이 바로 라칭거 추기경으로 불렸던 그다. 남미의 1960~70년대는 악화일로인 정치혼돈의 시대였다. 신부가 총을 들고 테러에 가담할 정도로 극단으로 흘렀다. 교회가 대지주와 부자들에게만 축복을 내릴 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의 교회를 부르짖었다. “지금, 이땅에서”라는 정치구호는 그래서 나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혼란스런 메시지도 해방신학을 거들었다. 해방신학의 광풍도 이제는 거의 잦아들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알현을 받았다. 사제단은 이 기회를 노린 것인가.
독일엔 기독민주당 등 종교정당들이 많다. 일본의 공명당은 창가학회가 만든 종교 정당이다. 그러나 이들조차 분명한 원칙을 갖는다. 종교단체가 자기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노선을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금지된다. 신자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은 기민당의 오랜 전통이다. 특정 종교 안에서조차 정치는 이처럼 상대적 가치의 세계다. 사제단은 정치활동을 성체성사(미사)와 혼동하지 말라는 주장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정치를 하려면 사제복을 벗고 하는 것이 맞다. 스스로 벗지 않으면 교단에서라도 벗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게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을 지키는 길이며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주장을 온전히 펴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 둘을 섞어 놓는 것은 정교분리에도 어긋난다. 교회와 사제복이 이들을 더욱 천방지축으로 만든다면 교회에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종교의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믿지 않을 자유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게 우리가 아는 종교 자유의 역사다. 성직자라는 이유로 정의를 독점하여 제멋대로 해석할 방종은 엄중하게 금지된다. 가톨릭은 평신도 사목이라는 단어로 교단의 민주적 운영원리를 이미 천명했다. 이론이 있고 철학이 있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미사를 올리며 왜곡된 정치적 편견을 신자들 앞에서 우쭐대는 것이라면 이미 빛도 소금도 아니다. 이런 주장을 요약해 세계 주교 시노드는 “정의를 말하는 자는 먼저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정의는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최저한으로서의 인권을 말하는 것이지 제멋대로 자라난 음습한 정치 강령을 포함할 수 없다. 사실 이런 논변들조차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내면의 성찰은 고사하고 정치논리조차 말라버린 정치꾼들이다. 김현희 가짜 소동에, 강정마을 ‘생쇼’에, 방폐장 난장판에, 천안함 조작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사악함에 물든 자들이다. 민주화 투쟁의 희미한 명예조차 씻어내는 어리석음이며!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이명박 전 대통령은 유럽순방 중 베네딕토 교황을 만났던 일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교황은 한국 천주교 일각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정치편향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먼저 밝혔다고 한다. 어떤 관계자는 비슷한 내용의 교황청 서한이 한국 교구에 전달됐을 것이라는 언질도 준다. 한동안 잠잠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그들이 낡은 깃발을 다시 올렸다. 증오와 적개심으로 가득찬 정치언어로 성소와 제단을 능멸하는 것은 비신앙인조차 수용하기 어렵다.
베네딕토 전 교황은 교황청 교리성 장관 출신이다. 한때 가톨릭 개혁의 기수였던 노련한 호교론자다. 1983년의 한 연설에서 그는 해방신학은 정치와 사회분석을 신학으로 분칠한 오류라며 선을 그었다. 나중에 4명의 신부를 파문시킨 장본인이 바로 라칭거 추기경으로 불렸던 그다. 남미의 1960~70년대는 악화일로인 정치혼돈의 시대였다. 신부가 총을 들고 테러에 가담할 정도로 극단으로 흘렀다. 교회가 대지주와 부자들에게만 축복을 내릴 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의 교회를 부르짖었다. “지금, 이땅에서”라는 정치구호는 그래서 나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혼란스런 메시지도 해방신학을 거들었다. 해방신학의 광풍도 이제는 거의 잦아들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알현을 받았다. 사제단은 이 기회를 노린 것인가.
독일엔 기독민주당 등 종교정당들이 많다. 일본의 공명당은 창가학회가 만든 종교 정당이다. 그러나 이들조차 분명한 원칙을 갖는다. 종교단체가 자기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노선을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금지된다. 신자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은 기민당의 오랜 전통이다. 특정 종교 안에서조차 정치는 이처럼 상대적 가치의 세계다. 사제단은 정치활동을 성체성사(미사)와 혼동하지 말라는 주장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정치를 하려면 사제복을 벗고 하는 것이 맞다. 스스로 벗지 않으면 교단에서라도 벗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게 교회를 보호하고 신앙을 지키는 길이며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주장을 온전히 펴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 둘을 섞어 놓는 것은 정교분리에도 어긋난다. 교회와 사제복이 이들을 더욱 천방지축으로 만든다면 교회에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종교의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믿지 않을 자유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게 우리가 아는 종교 자유의 역사다. 성직자라는 이유로 정의를 독점하여 제멋대로 해석할 방종은 엄중하게 금지된다. 가톨릭은 평신도 사목이라는 단어로 교단의 민주적 운영원리를 이미 천명했다. 이론이 있고 철학이 있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미사를 올리며 왜곡된 정치적 편견을 신자들 앞에서 우쭐대는 것이라면 이미 빛도 소금도 아니다. 이런 주장을 요약해 세계 주교 시노드는 “정의를 말하는 자는 먼저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정의는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최저한으로서의 인권을 말하는 것이지 제멋대로 자라난 음습한 정치 강령을 포함할 수 없다. 사실 이런 논변들조차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내면의 성찰은 고사하고 정치논리조차 말라버린 정치꾼들이다. 김현희 가짜 소동에, 강정마을 ‘생쇼’에, 방폐장 난장판에, 천안함 조작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사악함에 물든 자들이다. 민주화 투쟁의 희미한 명예조차 씻어내는 어리석음이며!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